주천면은 전남 구례군과의 경계로 국립공원 제1호인 지리산자락에 둘러싸여 있고 만복대에서 발원한 구룡폭포, 육모정을 거친 맑은 하천이 흐르는 4계절이 항상 쾌적한 환경의 고장이다.남원투데이 문화유적답사팀은 주천면의 문화유적을 찾아 남원시 주천면 면사무소 홈페지를 참고해 가면서 이른 아침부터 일정을 재촉했다.먼저
*주천면의 연혁은
757년 신라경덕왕 16년 남원부관할 3개방을 1910년 면으로 개칭
(개방 : 상원천방. 하원천방. 주천방)
1914년 3개면을 병합 주천면으로 개칭
1935년 노암리가 남원읍으로 편입
1983년 신촌·어현리가 남원시로 편입
1995년 1월 1일 도·농통합으로 남원시로 통합
*면 적 : 54.71㎢(시의 7.3%)
*인 구 : 2,659명(시의 2.0%)
*가 구 : 1,081가구(농가 551, 비농가 530)
*행정구역 : 11개법정리, 22개행정리, 35개자연부락, 40개반
남원시에서 6km지점인 동경 127도 27분에서 동경 127도 북위 35도 22분에서 북위 35도 36분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운봉읍과 산내면을 접경하고 있으며, 서쪽은 송동면과 남원시 노암동, 신촌동과, 남쪽으로는 수지면, 전남 구례군 산동면, 북쪽은 이백면과 접해 있다.
남원시와 전남 구례군과의 경계로 지역 일부가 지리산 국립공원에 편입되어 있다. 능선을 따라 남으로 해발 1,050m의 능선을 경계로 전라남도 도계를 이루고, 동으로는 운봉읍과 주천면의 경계인 1,030m의 정령치로 형성되어 있다. 면소재지는 해발 155m이지만 고기리, 덕치리는 해발 1,304m의 고리봉 산줄기에 접하여 해발 600m까지의 고랭지대인 관계로 같은 면내에서도 고도의 차가 심해 10일 이상의 기온차이를 보인다.
하천은 멀리 만복대에서 발원하여 구룡폭포, 육모정을 거쳐 동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원천천(元川川)이 남원시내의 요천(蓼川)으로 합류하여 섬진강의 상류를 이룬다. 임야가 총면적의 80%를 차지하고 있다.
미맥위주의 농업을 하고 있으며 산업구조는 전체가구 1,081가구중 551가구(51%)가 농가이고, 530(49%)가구가 비농가이다. 특산물로는 고냉지상추, 느타리버섯, 취나물, 복분자, 오미자, 두릅, 송이버섯 등이 생산되고 있다.
도로 총연장이 35.58km이며, 국도가 11.19km 지방도 24.39km로 국도 19호선은 남원시와 전남 구례를 경유하여 광주로 연결되고, 지방도 730호선은 남원대교에서 장안 삼거리 까지다. 장안 삼거리부터 육모정을 지나 정령치로 이어지는 도로는 국가지원지방도 60호선으로 100% 포장이 완료되었다.
* 관광지 : 정령치, 구룡계곡, 육모정
주요 문화재 : 용담사 석불입상(보물42호), 용담사 7층석탑(지방유형문화재 11호),
주천석장승(지방민속자료 16호), 난중잡록(지방유형문화재 17호), 원동향약(지방유형문화재 146호) 등이 있다
기 타 : 용양사, 경양사, 짐대당산, 용담사가 있고 지리산국립공원 구룡계곡의
육모정지내에 옛날부터 초라하게 있던 춘향묘가 1990년도에 산뜻하게
단장되어 있다. 동부고냉지(해발500m)와 서부중산간지로 형성되어 산림자원인지리산국립공원 및 육모정, 구룡계곡등 관광자원이 풍부하며 지리산권의 3도(전북·전남·경남)를 잇는 관광도로가 있다.
주천면의 관광지는
*육모정
육모정은 남원시 주천면 호경리 구룡계곡의 제2계곡인 옥룡추에 세워진 정자로 그 옆으로 춘향묘소가 있다. 육모정에서부터 주천면 고기리까지 이어지는 계곡이 구룡계곡이다. 4km의 계곡은 구비마다 비단결 같은 계류가 흐르고 원시림과 조화를 이루어 가을 단풍이 절경이다. 계곡을 따라 정령치, 달궁, 노고단으로 이어지는 지리산 관고아도로가 개통돼 지리산 등반 코스의 관문이다.
*구룡계곡
남원인근의 지리산 구룡계곡은 원시림을 헤치며 비단결같은 계류가 기암괴석을 굽이쳐 흐르는 심산유곡이다. 길이4.5km의 구룡계곡은 9곡(九曲)으로 이루어진다. 제1곡은 약수터지만, 실상은 그200m 위의 제2곡인 용소(龍沼)가 구룡계곡의 관문 구실을 한다. 용호석문(龍虎石門)이라고도 하는 용소는, 석문처럼 갈라진 바위틈을 뚫고 하얀 물줄기가 쏟아져내리다가 그아래에 깊은 못을 이루고 있다. 용소를 내려다보고 있는 정자가 육모정인데, 이에 따라 이 일대를 육모정 계곡이라고도 한다. 용소에서 제3곡 학서암, 제4곡 구시소, 제5곡 유선대, 제6곡 지주대, 제7곡 비폭동, 제8곡 경천벽을 거쳐 구룡계곡의 클라이맥스이자 종점인 제9곡 구룡폭포에 이르면 누구든 입을 다물게 된다. 길이 30m의 비스듬히 누운 와폭인 구룡폭포는 남원 8경 중에서도 제1경으로 꼽히는 절경으로서 소용 돌이친 다음 미끄러져 내리는데, 두려움마저 줄정도의 으스스한 분위기다.
*정령치
정령치(鄭嶺峙, 山內面 德洞里, 해발 1,172m)의 표기는 정령치(正嶺峙)로 표기하기도 한다. 아직도 옛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는 이 곳에는 넓은 산상 주차장과 휴게실 등이 자리잡고 있으며, 만복대(1,420m)의 등반기점이기도 하다.
정령치는 서산대사(西山大師)의 《황령암기(黃嶺岩記)》에 의하면, 기원 전 84년(기원전 74년에 이 곳에 성을 쌓았다고 기록됨)에 마한(馬韓)의 왕이 진한(辰韓)과 변한(弁韓)의 침략을 막기 위해 정장군(鄭將軍)을 이 곳에 파견하여 지키게 하였다는 데서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 황령치가 있는데, 황장군(黃將軍)으로 하여금 이 곳을 지키게 하여 황령치라 하였다. 지금은 그 위치를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덕동리 뒷산 '황나드리'라는 곳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노고단 입구의 성삼치(姓三峙)와 바래봉 남쪽의 팔랑치(八郞峙)도 각각 각성받이 3명의 장군과 8명의 병사들이 지키던 수비성터라는 데서 지명이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정령재 정상에 올라서면 바로 눈 앞에는 유순하게 흘러내리는 만복대가 다가오고, 운봉평야가 멀리 내려다 보이는가 하면 꾸불꾸불하게 포장된 정령치 도로도 보인다. 반야봉의 큰 덩치가 시야에 잡혀지기도 하여 사방의 전망이 탁 트인게 시원하다
*용담사7층석탑
전북 유형문화제 제11호(71. 12. 2.)
주천면 용담리 292
1기 높이 0.95m 세장한 7층탑
고려시대
높이 9.95m에 이르는 세장한 7층탑으로 주목된다. 상륜부를 결하였으므로 총 높이는 더 높을 것이다. 하변장 2.23m 상변장 2.19m에 높이 0.63의 방형기대석위에 높이 12cm 일변장 1.31m의 괴임을 새겨 초층 탑신을 받히고 있는데 기단은 이 일석만으로 대치하고 잇다.옥신도 위로 올라가면서 차츰 마멸되고 우주를 새겼는데 제5층옥신부에서는 2매의 면석을 좌우에 세워 옥신을 받치고 있는데 이 부위가 위약하여 탑신이 기울고 있다. 전체적으로 수법이 조잡하고 마감율도 불규칙하여 안정감을 잃고 있다.
*용담사 석불입상
보물 제 42호 (63. 1. 21.)
주천면 용담리 292
1기 높이 6m 둘레 4m
고려시대
이 석불입상은 높이 6.0m에 이르는 거상으로 측면을 제외하고는 거의 판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마모되었다. 대좌는 타원형의 자연석으로, 그 위에 입상을 발밑에 촉을 끼워 세운 것이다. 두부의 육계는 높으며, 얼굴이나 귀도 긴 편이나 안면마멸이 심하여 상호는 분명치 않다. 목에는 형식적인 삼도가 세겨져 있어 시대적인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측면은 편평하나, 귀의 처리는 뚜렷하다. 전면은 의문이 마멸되어 측면에서만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는데, 의습문은 굵고 듬성듬성한 음각의문이다. 광배는 불상과 일석으로 된 거신광으로서 상부 결실이 심하고, 외연을 따라 화염문이 있는 것 같지만 마멸되었다. 일부분만 남은 두부 후면의 원형 후광도 굵은 수법이나 세부 문양이 분명치 않다. 이 불상은 하나의 돌에 불신과 광배를 조각한 거구장신이며 조략한 옷무늬이나, 광배·대좌의 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보호각이 잇었느나 정유재란때 불타고 없어진후로 1998년 1억 5천만원의 국비로 새로운 보호각을 설치 하였다.
*호기리 석장승
민속자료 제16호(79. 12. 27)
주천면 호기리 산 63
1기, 높이 19.6m
조선시대
주천면 호곡마을에서 육모정 쪽으로 500m정도 떨어진 왼쪽 하천변 순열각 옆에 미륵이라고 불리우는 장승이 위치한다.이 돌장승은 지방민속자료 제16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크기는 높이 270cm, 두께 35cm, 너비 80cm 둘레230cm로 상당히 큰 편에 속한다.머리에는 패랭이를 쓰고 있으며, 눈이 둥글고 코가 크며 볼은 불거져 있고 웃는 모습을 하고 있다. 소박하고 투박한 모습으로 원숭이를 연상케 한다.악기를 들고 연주하는 듯한 모습을 연상케 하는 인상을 풍긴다.
*난중잡록
지방유형문화재(1984. 9. 20)
주천면 은송리 204
8권 보유
조선시대
난중잡록은 일명산서야사(山西野史)라고도 칭하는데 이 책은 조경남의병장이 엮은 것이다. 본 난중잡록은 선조15년(1588년)장군이 13세부터 쓰기시작 인조15년(1637년)까지 57년간의 국내의 중요사실을 일기식으로 기록한 것인데 특히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대목은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다루어진 귀중한 자료가있어 어느 면으로 보아서는 난중일기보다 높이 평가 되고 있다. 57년간의 대작품인지라 전질 10권을 둘로 나누어 후반5권을 펴의상 속잡록(續雜錄)이라 구분하고 있으며 본작품의 원본(필자 자필의원작품) 전문이 완손(完孫)에 의해 보존되고 있다. 작품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 임진, 정유재란기사와 그밖의 선조연대기사는 중요한 자료로 인증받아 후일 선조실록을 엮을 때 야사의 원본을 조정에서 빌려갔는데 이때 규장각은 그 전문을 사본으로 만들어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다.또한 조선숙종말에서 영조초기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동야승(大東野乘)에 의하면 난중잡록은 59종목의 각종 중요한 작품을 한데 엮은 것으로 1,232면을 차지하는 대작이다.이밖에 조경남장군의 작품으로 윤리변(倫理辯)5권, 성리석(性理釋)5권, 오상론(五常論)1권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원동향약
지방유형문화재 제146호(1994. 8. 10.)
주천면 호경리
1괄 20책
조선시대
원동향약은 선조 5년(1572년)에 설립되어 420여년간 존속계승된 것으로 인조16년(1638년)에 작성한 향약록과 숙종원년(1675년), 영조25년(1745년), 정조(1780년)에 만들어진 표창록등 20여권이 전하고 있다.지질은 한지로 만들어졌으며 창호지가 많다. 크기는 조금씩 다르며 현재 전해지고 있는 20여권은 다음과 같다.원동향안, 원천동약중수안, 원천원동수안, 동약중수안, 원천동향약안, 위로연기, 원천재계안1, 원동계안2, 원동계안, 용호계안, 용호정중건계안, 3원동계안(계묘), 4원동계안(신해), 원동향약계중수안, 용호계, 용호계시사, 원동계용호시사, 시도기, 애감록, 부의록등이 있다.주천면 육모정광장에 이의 내력을 알리는 비문이 있으며 후손들이 매년 한번씩 모임을 갖고 있다.
이밖에도
호기리 마애여래좌상, 주천리 고인돌, 주천리 소나무, 은송리 고인돌,은송리고분, 용궁리 느티나무 와 산수유 나무등도 앞으로 가꾸고 보존해야할 중요한 문화재라 할수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