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쪽에는 만행산 천황봉, 남쪽으로는 고남산 태조봉이 우뚝 솟아 있고 면 중심부를 섬진강 상류 맑은 요천이 비옥한 농경지를 적시며 흐르는 살기좋은 청정고장이 산동면이다. 먼저 산동면에서 첫 코스는 청룡사 마애석불군이었다.청룡사에서 약10분을 올라가면 있다고 들었으나 한두시간을 헤매다 그냥 하산했다.이어 산동면 목동리 요계서원을 갔다.서원은 없어지고 서원터만 남아 있었다.골목에서 들깨를 탈곡하고 있는 농촌의 모습은 너무나 정겨웠다.이어 태평리 고분군을 찾았다.여러구가 있는 고분군의 경치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았다.같은 일행은 그곳에 집을 짓고 살고 싶다고 할 정도로 풍경이 좋았다.
오늘의 마지막 코스다.태평리성(太平里城)이다.태평리성은 남원시의 동북 12Km에 해당하는 지점인 태평부락의 서남쪽에 있는 성산(해발220m)에 자리 잡고 있는 석성이다.요천(蓼川)에 면하고 있는 동쪽 사면은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그 외의 3면에는 외곽에 토성을 두루고 산의 정상부에 자연석을 이용하여 석성을 쌓았다고한다.남아 있는 석성의 높이는 3.5~4.0m 내외이고 성 안에는 망루(갯대석)로 보이는석조물이 산 정상에 자리잡고 있었다.다량의 와편이 지상에 노출되어 있고 건물 유구도 보였다. 토기편과 성의 아랫 부분에 자리하고 있는 고분군(古墳群)으로 미루어 볼 때 삼국시대에 축성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들녘의 농부들이 알곡을 거두어 들이시는라 고생이 많으신것을 보니 어렷을적 생각이 난다. 이맘때면 가을 무우를 뽑아 생채를 해서 맛있게 비벼먹었었는데........ 우리일행은 산동 인심에 놀랐다 .배가 고픈것을 미리 아셨는지 드시고 계시던 쑥버무리떡을 서슴없이 주셨다.정말 꿀맛이었다. 아직 우리남원은 인정이 넘치는 도시임에 틀림이 없다.올가을 남원시의 각 면을 돌면서 아직 살만한 도시라고 자랑하고싶다.
며칠 후 산동면을 다시 찾았다. 문화재인 귀정사다. 연혁으로 이 곳은 백제 무녕왕 15년(515) 만행사(萬行寺)라는 절을 세웠던 터이다. 후에 왕이 3일간 이곳에 머물면서 업무를 보다가 돌아 갔다고 해서 절 이름을 귀정사로 고쳤다고 한다. 귀정사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여러 차례 고쳐 세웠는데, 절의 위용이 대단하여 조선 세조 때에는 승려의 수가 200명을 넘었고 법당과 암자 등 수많은 건물과 시설을 갖추었다고 한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불탄 후 상당 부분을 복구하였으나, 6·25 때 공비토벌을 위해 유엔군이 모두 불 태웠다. 현재의 건물은 주지스님 유정동의 노력으로 1960년대에 다시 지은 것들이다.
이어 산동면 부절리 산 107 (문자 제60호(84. 4. 1) 에 있는 석탑이다. 이 석탑은 조선시대에 만든 것으로 높이 9m에 이르는 대형탑이다. 창덕암은 1933년 김씨 부인이 세운 암자로, 부녀자들이 기도를 드리는 곳으로 유명하였다고 한다.이곳에서 기도한 사람은 신의 도움으로 소원성취 한다고 소문이나, 음력 4월 8일 석가탄신일이면 기도하러 오는 부녀자들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석탑은 층이 올라갈수록 너비와 높이가 별로 줄지 않으며, 구조가 단순하고 선이 굵고 두터은 느낌을 주었다.
면을 돌면서 느낀점이 있다면 총,효,열의 비석이다.산동면도 역시 예외는 아니다. 제일먼저 산동면 부절리 산 107 에 소재 해 있는 전주 최씨는 1830년 17세의 어린 나이에 장흥고씨와 혼인, 2년후인 1832년(19세)에 유복자를 남긴 채 남편과 사별하고 청상의 몸으로 가정 형편이 지극히 곤란함은 물론 주위의 유혹과 문중에서 재가의 권유도 있었으나 오히려 정절을 굳게 하고 어린 유복자를 훌륭하게 잘 길러야 되겠다는 굳은 의지로 어려운 가사를 번창하게 하고 정절로 가문을 빛냈으며 1878년에 세상을 떠나매 그 정절이 원근에 자자함은 물론 타의 가문에 수범이 되어 고씨 문중에서는 1880년 그 정절을 기르기 위하여 열려문을 건립하여 후세에 귀감이 되고 있다. 그 다음은 산동면 부절리 1987-1 의 최재형(1883 ~ 1900) 이다.전주 만육공의 후손으로 처 밀양 박씨와는 남다른 부부애가 두터웠으며 형제간은 물론 이웃에게까지 우애와 효성으로써 어른들을 모셨고 부모님께는 하루가 멀다하고 깨끗한 옷을 갈아 입히고 부모님의 건강을 위해 구미에 맞는 물고기를 구하기 위하여 겨울에도 얼음을 깨고 물고기를 잡아 식성에 맞도록 부모님을 공경하였으며 넉넉치 못한 가세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에게 조그마한 심중도 끼쳐 드리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항상 얼굴에 웃음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부모님이 병석에 누었을 때는 주야로 온갖 정성을 다하였고 병세를 알아보기 위하여 요변의 맛을 보아 병세를 진단하는 등 그 정성이 심금을 울렸다고 한다.부모님의 상을 당하였을때는 인근 마을까지 울음 소리가 들렸으며 이러한 소문이 각처에까지 자자하여 부절 최씨 문중에서는 이 부부를 후세에 알리고자 귀감을 삼아 효자비를 건립 하였다고 한다.또 빼어 놓을수 없는곳이 산동면 식련리 산 1-3 에 소재해 있는 백제때 신라를 향한 국경의 연접성으로써 군사용의 양곡을 저장하는 성으로 합미성이라 부르기도 하였다는데.....
또 최여운(1750 ~ 1821) 시호는 면욱당이며 최여운의 아우 최여구(1770 ~ 1830) 시호는 참호 이다.소재지는 산동면 부절리 1992-2 이다. 위 두분의 효자는 고려초 전주최씨 만육공의 11대 자손으로써 평소 남다른 범인을 초월하는 효행이 극진한 형제였다.부모상을 당하여 선영이 부절에서 16km 떨어진 장수군 마전등 심심 계곡에 묘를 만들었으므로 3년간 여막 시묘 생활을 하여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고 산신까지 감동케 하였으며 밤이나 호랑이가 나타나 불을 밝혀 보호하였다 한다.두발과 손톱은 부모가 물려준 살붙이라 생각하고 시묘 생활 중에는 자르지 않아 원시인과 유사하기도 했다.형 여운은 어린동생 여구와 시묘생활시 아우의 식사를 이른 새벽과 늦은 저녁까지 매일 부절에서 묘소까지 운반 제공했다 함은 말로써 형연치 못한 고생과 어려움이 뒤따라 왔으며 부절에서 내려올때는 호랑이가 하루도 빠짐없이 주위를 보호하고 사라지곤 하였다 한다. 눈물겨운 이야기다 .현실에 맞지않는 이야기라고 반론을 제기할지 모르지만 하늘이 맺어준 천륜의 이치는 그 누구도 못막는 법임을 느껴본다.
산동면의 일반형황은 . 산동면은년(1654) 산동방에서 번암이 장수로 분리되었다. 1897년(고종 34년)에 8도를 13개 도(道)로 개편하면서 방(坊)이 면(面)으로 바뀌었고, 산동면이 중심이 되었다.1910년 목동방이 산동방에 병합되어 만행산 동쪽에 위치한 지리적 위치 때문에 산동면(山東面)이라 하고 목동(木洞), 식련(植蓮), 이곡(梨谷), 태평(太平), 신풍(新豊), 대촌(大村), 부곡(釜谷), 중절(中節), 등구(登九), 선촌(仙村), 신기(新基), 대치(大峙), 상점(上店), 석동(席洞), 월산(月山) 등 15개 리(里)를 관할 하였다. 그 후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목동(木洞), 식련(植蓮), 태평(太平), 부절(釜節), 대기(大基), 대상(大上), 월석(月席) 등 7개 리(里)로 개편하고 면사무소를 부절리(釜節里)에 두었다가 1924년 면사무소를 태평리(太平里)로 이전하여 오늘에 이른다. 1995년 1월 1일 남원시 군이 통합되어 남원시 산동면으로 되어 현재는 7개 법정리, 15개 행정마을로 나누어져 있다.
남원시에서 동북쪽으로 15km지점인 동경 127도 28분 북위 28도 9분에 위치 하고 있는 산동면은 동쪽으로는 장수군 번암면, 남쪽으로는 운봉읍 및 이백면, 서쪽으로는 도통동 요천마을, 갈치마을, 북쪽으로는 보절면이 인접하고 있다. 국도 19호선(남해∼원주)이 동서쪽으로 관통하고 있고 88고속도로가 일부 마을을 지나고 있다. 전체면적은 5,049ha로 남원시 전체면적의 7.4%를 차지하며, 전답별 비율은 답 553.8ha로 농경지의 80.7%이며, 전은 132.3ha로 농경지의 19.2%이다. 임야는 4,363ha로 산동면 전체의 86%에 해당한다. 일반적 지세는 소백산맥의 한 줄기가 동쪽으로 솟아 대성산(大成山)이 되고, 북쪽으로 만행산이 높이 솟아 천황봉(天皇峰)을 이룩하였다. 남쪽으로는 고남산(古南山)의 태조봉(太祖峰)이 자리잡고 있다. 산림형태 총면적의 86%를 차지하고 있는 산에는 소나무와 활엽수가 숲으로 덮여 있으며 유실수 가꾸기에 힘써 감, 밤 등 유실수를 마을주변의 산에 조성(임야 총면적의 5%정도)하여 주민소득 증대에 기여하고 있다.
해발고도 산동면의 평균고도는 200m이다. 동부는 산악지방으로 해발 240m이며, 서부는 180m로 대체로 동서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농사위주의 농업을 하고 있다. 산업구조는 농림업 100%이며, 토산물로는 산에서 약간의 산송이와 대상리의 토종꿀이 유명하며, 중절과 등구에서 밤이 생산된다.도로의 총 연장 길이가 49.2km인데 국도19호선(10.3Km), 면도 2개소(6.0km), 리도 5개소(8.4km), 농도 8개소(14.5km), 88고속도로(10km)로 되어있으며 마을전체 가구에 전화가 가설되어 있다. 문화재로는 귀정사지(지방기념물 제76호)와 창덕암3층석탑(문화재자료 제60호)이 있으며 격년제로 8월 15일 면민의 날 행사가 열리고 있다.
공공기관은 산동면사무소. 이백지구대 산동치안센터. 농업기술센터 산동농민상담소. 산동보건지소, 산동면 면대본부, 산동우체국 이 있으며 금융기관은 산동농협, 산동새마을마을금고이며 교육기관은 산동초등학교가 있으며 복지시설은 산동면복지회관과 15개마을에 노인회관이 있다. 불교시설은 귀정사와 창덕암 봉황사 청룡사 승련사 가 있으며 원불교와 기독교는 산동교회 태평교회 반석교회 대상교회 예스터민족기도원 화평교회 신암교회 충절교회가 있으며 주요기업으로는 청국장을 생산하는 발효나라가 있다.
특히 마을 유래를 관심있게 적어보고싶다.먼저 목동리 목동(木洞)마을은 선조 3년에 김일(金鎰)의 후손인 김익복(金益福)이 부안군에서 출생하여 금지면 순흥 안씨를 아내로 맞아 세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세 아들은 마을뒤 풍곡사 주변의 운중발룡형(雲中發龍形)의 터에 선조를 모시면 자손들에게 큰벼슬이 이어지고 번창할 것이라는 말에 따라 이곳에 묘를 쓴 후 그 자손들이 살아옴으로써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후 많은 성씨들의 들어왔으나 이씨 오씨 등 몇가구를 제외하고 모두 부안김씨로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본래 마을 주변에 나무가 무성하여 『나무골』로 부르며 지명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목동(木洞)으로 바뀌었다.예부터 이 마을은 반촌(班村)으로 이름난 곳으로 임진왜란 당시 영광군수로 재임하다 권율장군의 막장으로 싸우다 순국한 김익복을 비롯하여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고, 대학교수, 석사, 박사 등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박사 마을이다.1943년에는 마을 회관이 건립되었고 1963년도에는 애림녹화로 목동산림계가 대통령 표창을 받았으며 정부 지원으로 회관을 헐고 그 자리에 1984년 종합복지시설인 복지회관을 건립하였다.농촌지도소에서 시범건강 마을로 선정 공동작업장, 체육시설을 설치하는 등 앞서가는 마을로 발전하고 있으며 1996년 마을에 경지정리를 완료하였다.이 마을은 1961년 당시 전국에서 제일 앞서가는 마을로 선정되어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인 박정희장군이 방문하였으며, 1692년(숙종 18) 에 부안 김씨 충경공 김익복의 아들 김화를 주벽으로 모셔 건립된 요계서원(蓼溪書院)의 터가 남아 있다.
이어 필자가 관심이 많은 식련리 식련(植連)마을이다.본래 남원군(南原郡) 산동면 식련리(植連里) 지역으로 승련(勝蓮)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때 이곡리(梨谷里) 일부를 병합하여 식련리라 하였다고 한다. 1490년경 김해 김씨(金海金氏)가 처음 터를 잡았는데 부근에 승련사(勝蓮寺)라는 큰절이 있었다고 하며 이러한 연유로 본래 이 마을의 이름은 승련(勝蓮)이었다고 한다. 그후 식련리(植蓮里)로 바뀌었는데 그 연유는 알 수 없다.만행산 연화봉(蓮花峰) 아래에 위치한 식련마을은 국도 19호선이 통과하며, 마을 앞으로 굽이굽이 흐르는 맑은 물의 요천수가 있고, 숲이 우거진 구릉성 야산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가진 마을이다.이 마을 주변에는 삼한시대에 쌓았다는 합미성(성산산성)은 전쟁때 군량미를 저장하였다고 하며, 동학난때 동학군의 집결지였다고도 한다. 또 마을의 동쪽에 옛 성터가 남아 있어 관심있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1975년 회관이 정부의 지원으로 건립되었으며 그뒤 노인정 모정 등이 차례로 건립되었고 1997년 경지정리가 완료되어 나날이 발전 해가고 있다.
이어 부절리 부동(釜東)마을이다. 본래 남원군(南原郡) 산동면(山東面) 부곡리(釜谷里) 지역으로 가말 또는 부동(釜洞)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때 부동리(釜洞里), 중절리(中節里), 이곡리(梨谷里) 일부를 병합하여 부동과 중절의 이름을 따서 부절리(釜節里)라 하고 부절리에 편입 되었다. 1975년 부동리(釜洞里)가 부동(釜東), 부서(釜西)로 나뉘어졌다.남원시에서 동쪽으로 12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 마을은 동쪽에 고남산(古南山)을 등지고 북쪽에는 동서로 요천수가 흘러 산자 수명한 마을이다.농경지는 비교적 평탄하고 기름져서 쌀의 질이 좋아 옛날에는 부절쌀을 진상미로 올릴만큼 질이 좋았다고 한다.고려 말엽 마을 동쪽으로 1km쯤 떨어져 있는 속칭 퉁덤에서 평산 신씨(平山申氏)가 살았다 하며, 동쪽으로는 500m에 위치한 현재의 ‘개양골’에서 양씨(梁氏)가 살았다고 한다.그후 조선조 선조때(1600년경) 전주 최씨(全州崔氏), 밀양 박씨(密陽朴氏), 전주 이씨(全州李氏)의 세성받이가 이곳에 정착하여 살기 시작함으로써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본래 이름은 가말이다.조선조 정조때 이서구(李書九)대감이 전라감사 시절에 이곳을 지나다가 마을을 가르키며 만사람을 배불리 할 수 있는 곳이라는 만인호인지상(萬人好人地相)이라 감탄했는데, 이에 따라 지세가 가마솥과 같다하여 처음에는 ‘가마말’ 또는 ‘가말’ 이라고 했다가 지명이 한자로 바뀌면서 부동(釜洞)으로 바뀌었다. 그뒤 행정구역을 1구, 2구로 나누었다가 1975년도 주민조직 개편에 따라 부동(釜東)과 부서(釜西)로 나누었다.정부지원으로 1992년 마을회관(2층 80평)을 건립하여 부동과 부서가 마을 발전을 위한 공동의 장소로 활용하고 있으며, 1997년 경지정리가 완료되어 마을 앞에는 넓은 평야가 형성되어 있다.마을안에는 ‘上之 30年命旌’이라 새겨진 효자, 효부 정려비(旌閭碑)가 있는데 최재형(崔在衡)부부의 시묘살이의 효성이 지극하여 고종 30년(1893)에 조정에서 하사하였다. 마을앞에 있는 최용전(崔龍田) 선생의 유허비는 옛 우리 조상들의 삶을 짐작케 해 준다.
태평리 이곡(梨谷)마을은 본래 남원군(南原郡) 산동면(山東面) 이곡리(梨谷里) 지역으로 지형이 이화낙지(梨花落地) 형국이어서 배실 또는 이곡(梨谷)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때 태평리(太平里), 신풍리(新豊里), 이곡리(梨谷里), 대촌리(大村里)의 각 일부가 병합되어 태평리라 하고 태평리에 편입되었다.1420년경 고려말 장연 변씨(長淵邊氏)가 처음 터를 잡아 거주하던 중 조선조에 들어와 병자호란때 함양 오씨(咸陽吳氏)가 입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그후 함안 조씨(咸安趙氏), 남원 양씨(南原梁氏)등이 입주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맨처음 정착하였던 장연 변씨는 모두 떠나다.본래 이름은 배실이다. 마을의 모양이 배를 잡아 맨 것 같다하여 처음에는 배실이라 불러오다 땅모양이 배(舟)를 잡아 맨것 보다는 배꽃(梨花)이 사방(四方)에 날려있는 형태라하여 배나무의 배실로 고쳤다고 하는데 마을의 지형이 배꽃이 떨어진 이화낙지(梨花落地) 형국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불려진 것으로 보이며, 지명을 한문으로 옮길때 배이(梨), 골작 곡(谷)자로 이곡을 표기하였다.이곡마을은 남원시에서 14km 동쪽으로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국도 19호선이 이마을의 중앙을 통과하고 마을 앞으로는 백제때 쌓은 것으로 짐작되는 성산산성(城山山城)이 있으며 성밑으로 요천수가 유유히 흐른다.뒤로는 연화봉(蓮花峰)이 웅장하게 내려다 보이고 있는 평화로운 마을이다. 1996년 정부지원으로 회관을 건립하여 주민의 화합의 장으로 이용하고 있으며 1997년 경지정리가 완료되었다.
대기리 대촌(大村)마을은 본래 남원군(南原郡) 산동면(山東面) 대촌리(大村里) 지역으로 큰 말 또는 대촌(大村)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때 등구리(登九里), 선촌리(仙村里), 신기리(新其里), 대촌리(大村里), 대치리(大峙里)의 각 일부가 병합되어 대촌과 신기의 이름을 따서 대기리(大基里)라 하고 대기리에 편입되었다.조선조 세조(世祖)때인 1460년경 능성 구씨(綾城具氏)가 처음 정착하였다.그후 부안 김씨(扶安金氏), 서산 유씨(西山柳氏)가 이주해와 마을을 형성 하였다.본래 가장골, 용소골, 대바위골, 작상골 등 여러 작은 마을을 거느린 중심마을이어서 ‘큰마을’ , ‘큰말’이라 부르다 지명을 한자로 바꾸면서 대촌(大村)으로 바꾸었다.구한말 이전까지는 산동방(山東防)의 창고와 옥(獄)이 있어 큰마을을 이루었으나 지금은 흔적도 없다.그런데 옥은 현감이나 원님등이 있는 고장에만 있는 관청이니 이곳에 옥이 있었다면 당시 현감이 주재하는 고을이 된다. 그렇다면 조선시대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이전 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대촌마을은 국도 19호선의 국도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뒤로는 천황봉(天皇峰)이 웅장하게 솟아있고 앞으로는 고남산(古南山)이 있다.그밑으로는 요천수가 흘러 경치도 좋으려니와 천연적인 수리시설이 잘되어 농사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주민의 생활수준은 영세성을 면치 못하였으나 1970년대의 새마을 운동에 따라 마을의 면모를 새롭게 해오던 중 1970년도에는 남원군 취락구조 개선마을로 선정되어 주택개량을 하였으며 79년도 마을회관을 건립하였고, 1996년 경지정리 사업을 완료하였다.
월산리 월산(月山)마을은 본래 남원군(南原郡) 산동면(山東面) 월산리(月山里) 지역으로 큰 달뫼와 작은 달뫼가 있어 달뫼 또는 월산(月山)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때 월산리(月山里)와 석동리(席洞里)를 병합하여 월산과 석동의 이름을 따서 월석리(月席里)라 하고 월석리에 편입되었다.1300년경 대성산(大聖山)아래 삼봉(三峰)의 서당기(書堂記)가 있어 이곳에서 성인(聖人)을 배출한다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여기저기에서 많은 씨족들이 찾아 들었는데 농토가 기름진 이곳을 찾아 온 씨족들은 나주 임씨(羅州林氏), 서산 유씨 12대손, 밀양 박씨 11대손이 각각 정착함으로써 일찍부터 큰 마을을 형성하였다.월산마을은 본래 달뫼였다.마을은 대성산(大聖山) 자락에 자리한 큰달뫼와 영월산(迎月山)아래의 작은 달뫼가 있었다.마을을 둘러 싼 산이 반달형으로 생겨 마치 솟아오른 달을 맞이하는 형상인데 대성산을 ‘큰달뫼(大月山)’ , 영월산을 ‘작은달뫼(小月山)’라 불렀는데 1654년 행정개편으로 작은달뫼(小月山)가 장수군 번암면 대론리(大論理:논실)로 편입되었다. 일설에는 마을 터가 높아 달이 다른 마을에 비해 먼저 비친다고 해 월산이라고 했다고 한다.마을 앞에는 요천수가 사철 풍부하게 흐르고 있어 벼농사는 해마다 풍작을 이루며 주민 전가구가 농사에 종사하고 주변에 높은 산이 있어 산림 지원이 풍부하며 특산물은 약간의 감이 생산된다. 1972년 새마을운동에 따라 마을안길 넓히기, 지붕개량, 담장정비등 생활환경 개선과 더불어 많은변화를 가져왔으며 1988년 마을회관이 정부지원으로 건립되어 마을발전과 화합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고 1995년 경지정리가 완료되어 날로 발전하고 있다. 장수군(長水郡)과 경계마을이다.
대상리 대상(大上)마을 본래 남원군(南原郡) 산동면(山東面) 대치리(大峙里) 지역으로 한재 또는 대치(大峙)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때 상점리(上占里)와 대치리(大峙里) 일부를 병합하여 대치와 상점의 이름을 따서 대상리(大上里)라 하고 대상리에 편입되었다고 한다.1500년경 창녕 조씨(昌寧曺氏)가 맨처음 정착하여 살기 시작하였으며 그후 김해 김씨(金海金氏), 장흥 고씨(長興高氏)가 들어와 함께 살게 되었다. 1950년 6. 25사변으로 인하여 마을이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가 1953년 다시 장흥 고씨가 들어와 살게 되었다.마을은 천황봉 자락이 흘러내려 형성된 분지형태의 골짜기에 형성된 마을로 북재(北峙), 말재(馬峙), 갓재(加峙), 둔병치 등 여러 높은 고개가 많은데 큰 고개가 많다하여 한재로 불렀는데 ‘한재’의 ‘한’은 큰 것을 뜻함으로 큰 대(大)자를 넣어 대치(大峙)가 되었는데 1914년 한재와 상점을 병합하여 대상(大上)으로 바뀌었고 1972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대상리(大上里)로 되었다.원래 이 마을은 농업이 주가 되는 영세한 마을이었으나 1972년 새마을 운동으로 지붕개량, 마을안길 넓히기 등 환경개선사업을 하였고 또 방대한 밀원으로 한봉이 유명하며, 산나물이 많이 생산되어 소득증대에 도움을 주고 있다.1994년 정부의 지원으로 회관이 건립되었다.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옛날 천황봉 아래 만행사(萬行寺)라는 절이 있어 고승의 설법이 신통하고 유명하여 이 소문을 들은 왕이 만행사에 행차하여 삼일동안 설법을 듣고 정사를 살폈다고 하여 절 이름이 귀정사(歸政寺)로 바뀌고, 마을의 지명들도 요동, 당동, 둔병치 등으로 바뀌었다고 하며 그때가 요순시절만큼 태평하였다고 전해온다.
꼭 소개하고 싶은 자랑이 있다.
소재지 : 전라북도 남원시 산동면 대상리 942-1번지
수령 : 약 100년
수고 : 6.1m, 수관목 6.4m, 근원경 28cm
학명 : Hibiscus syriacus L.
영명 : Rose of sharon
한자명 : 木槿
분포지역 : 동북아시아(한국, 중국, 일본, 인도 등)
품종명 : 홑꽂 홍단심계, 남원
위의 나무는 산동면의 자랑거리다.가장 오래 된 나무로 일제치하에서 민족정신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우리 나라꽃 무궁화를 모두 베어내도록 하였음에도 민족정신이 투철한 이곳에서는 베어내지 않았던 가장 오래된 큰나무로 해방후 이곳의 종자를 채취하여 전국에 보급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홑꽃 홍단삼의 나라꽃이다. 이 무궁화의 특징은 오랜역사를 한민족과 함께 해온 끈기와 민족성을 표현한 대한민국의 나라꽃(國花)으로서 순결하고 강인하며 한마음으로 뭉치는 우리민족의 품성을 잘 나타내는 꽃이다. 무궁화는 초여름부터 늦가을까지 100일여동안 크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며, 한송이의 꽃은 이른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고 다음날 아침 다시 새로운 꽃을 피우기에 날마다 신선함을 느끼게 한다. 이처럼 꽃과 꽃이 끝없이 이어지는 꽃이라는 뜻에서 "무궁화"라 이름하였으며 영원토록 웅비하고자하는 우리민족의 기상과 염원을 담고 국민에게 사랑을 받아온 꽃으로 이것이 바로 한국인의 참모습이다.
아래 산동의 전설은 산동면사무소 웹에서 만나길 바라며 하루의 문을 닫는다
귀정사(歸政寺)의 삼일왕정 귀정사 중창 유래
귀정사 재물담T 목동리 은행나무 승련사(勝連寺)와 식련리(植蓮里)
식련마을 뒤 바위의 전설 식련리 당산제
석동 당산제 월산 당산제
부절 당산제 부절 관암(冠岩)
중절 당산제 목동 당산제
신풍 당산제 태평 당산제
등구 당산제 대촌 신기 당산제
대상 한재 당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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