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을 잇자! 남원에서 걸출한 세계적인 인물 세 명이 배출 되도록......
남원은 유사 이래 일본과의 악연이 많은 곳이다.
그 흔적은 고대소설과, 황산대첩비지나 만인의총 그리고 정유재란 당시 남원성의 전투현장인 (구)남원역사 등 각종 전란 사에서 그 흔적과 잔재를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맥을 뻗어 내리다가 태백산을 거쳐 남서쪽의 지리산에 이르는 국토의 큰 줄기를 이루는 산맥인 “백두대간!” 그 백두대간은 우리 한민족의 인문적 기반이 되고 있는 산줄기 이며, 자연적 상징이다.
지난(2007.7.19) 남원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장(한병옥)은“남원지역의 일본과의 악연과 왜곡된 역사”라는 주제의 강좌에서 일본은 백두대간으로 지리산을 잇는 목 부위를 절단하여 맥을 끊고 있음은 심히 안타까운 일이라며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남원시 운봉면과 주천면의 경계가 되는 노치(가재)마을은 백두대간의 능선을 중심부에 두고 형성된 마을이다.
일본 놈들은 그 동네중심부로 흘러내려온 산줄기(백두대간 줄기)를 절단하기 위하여 두 군데의 연못을 팠으며 그 산맥의 기가 통하지 못하도록 조임돌(목돌, 돌쇠말뚝)을 만들어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의 맥을 끊어버렸다.
현재 이곳은 백두대간 능선이 잘려진 채 경작지와 도로가 되어 차량들이 통행하고 있다.
목 부위의 조임돌(목돌, 돌쇠말뚝)은 경작을 하던 농민이 논밭을 갈 때 농기구에 걸려 6개중 5개를 파다 본인(운봉읍 주천면의 신모씨)의 정원에 보관하고 있으며 아직도 1개가 목을 조이고 현지에 남겨져 있다고 한다.
동네 어르신들의 말에 의하면 일본 놈들이 도면과 축지법을 써서 연못을 파고 조임돌을 설치하자 지리산이 사흘을 통곡하였다고 한다. 날(지리산과 이어지는 백두대간 능선)을 끊지 않으면 지리산 주변에서 천지를 좌우하는 인재가 세 사람이 나오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매천야록』(梅泉野錄)에 의하면 백두대간을 끊어 연못을 만든 것은 일제가 아니라 우리나라 돌팔이 풍수였고, 그 돌팔이 풍수는 고종에게 이를 상주하여 벼슬살이 까지 했다고 한다. 그 돌팔이 풍수는 지리산의 정기가 남해를 거쳐 일본으로 들어가 우리나라가 이 모양이니 지리산으로 백두의 정기가 들어 갈수 없게 하려면 백두의 대간 능선을 끊어야 한다고 상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병옥강사”는 이러한 매천선생의 기록은 중요성과 그 가치는 당연히 인정하지만, 그러나 그렇게 쓰여 있다 보다 ‘왜 그렇게 쓰여 졌느냐? 와 누가 그렇게 쓰여 지게 했느냐?’가 더 중요하며 그것을 읽어내지 못하는 학자는 진정한 학자일 수 없다고 단언을 하였다.
지난 1998년 언론은 백두대간이 확인되었음을 발표하였다. 이로 인하여 일본에 의해 제작된 산맥형성이 아닌 백두대간 되찾기 운동이나 백두대간을 지도에 표기 하자는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백두대간이 수계의 경계며, 도의 경계로 이용되고 있지만, 남원은 마을을 지나고 있고 또한 백두대간을 차량으로 달릴 수 있다.
특히 남원은 일본 놈들의 백두대간의 파괴 정책에 의하여 현재, 경작지와 도로가 되어 백두대간의 명맥을 찾아볼 수가 없다.
우리의 선조들은 백두대간을 신성시 하였고, 오늘날 사회의 일각이나 학자들도 우리의 산맥 찾기 운동으로 백두대간 순례가 이어지고 있다.
일본 놈들에 의해서 훼손되었지만 다시 기능을 다할 수 있도록 복구하는 일은 우리의 할일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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