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후의 명작이 있는 고장은 빛이 난다. 그 고장의 전통과 명승, 정체성이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춘향전과 용성지는 남원의 명작으로 간행된지 300년이 넘었다. 특히 남원은 고장을 가꾸며 살다간 유림들이 많은 명저를 남기셨으며 전북에 남겨진 문집 중 70~80%를 차지한다고 한다.
불후의 명작 춘향전과 용성지는 남원인이 낳은 위대한 명저이다. 춘향전은 수많은 이본과 판소리, 희곡, 영화 등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으나 용성지(龍城誌)는 그렇지 못하다. “용성”은 남원의 애칭이며 백제때 고룡(古龍)에서 비롯되었고 춘향전의 요람 “춘향골”은 예명이며 “남원”은 통일 신라 때 남원소경에서 유래되어 붙여진 이름이다.
남방고도 남원은 영호남 요충지에 있으며 동북으로 지리산과 서남으로 섬진강이 있어 형승이 풍요로워 고려 때 국자감 박사를 비롯 조선시대 문과급제 140명 생원 220명 진사 169명의 인재를 낳고 많은 문화유산이 전승되고 물산이 풍부하여 호남의 으뜸이였으나 오늘의 현실은 침체되고 낙후된 고도에 불과하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남원이 옛고도로서 명성이나마 갖게 된데는 용성지가 이를 대변하다. 용성지를 맨 처음 간행한 해는 조선조 숙종 25년(1699)이다. 이때 용성지를 편찬하게 된 동기를 서문에서 보면 용성읍이 있게 된 이래 1600여 년 동안 남원의 역사와 문물에 대한 기록은 빈약하였고 더구나 정유재란으로 기록물들이 손실되어 남원부 만이 읍지를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남원사람들은 못내 아쉬워해 온 터였는데 마침 영조때 성주(城主)로 부임한 남원부사 이공(李公) 구징(耈徵)이 조정의 명을 받아 성종10년(1479)에 편찬된 「여지승람」의 신증(新增)의 내용을 수찬 진달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 이공은 남원부의 여러 사람들에게 이사업은 반드시 적임자를 얻어야 만이 가능한 일이니 그 누가 적임자요? 라고 물으니 모두 이도(李燾)와 최여천(崔與天)이라 하였다. 마침내 이도와 최여천은 「여지승람」 신증의 내용을 처음부터 마칠 때까지 책임을 지고 관장하였다. 그런데 이도와 최여천은 여지승람신증의 내용을 좀 더 추연(推演)하여 오래 오래 전할 것을 도모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때 용성지의 간행에 참여한 사람은 찬수유사(纂修有司) 이도와 최여천 간행유사(刊行有司) 안휘도 교정유사(校正有司) 우순필과 양성래 였으며 서문은 최시옹이 썼다. 이들은 수년간 각고의 노력으로 사료를 모아 “용성지”라는 대작을 남겼다.
이도(1639-1713)는 남원시 사매면 매계서원에 배향되여있고 묘는 남원시 보절면 서치리 있으며, 최여천(1642-1708)의 묘는 구례읍 월암리에 있다. 용성지에 기재된 내용은 충신과 현신을 제사하는 사원, 효자와 열녀들의 홍전문, 성지, 사관(寺館)과 누정 전결(田結 : 논밭에 물리는 과세)과 호구(戶口)의 많고 적음과 산천과 도로의 멀고 가까움, 성씨의 유래와 묘지 있는 곳, 토산물의 있고 없음과 풍속의 오염과 융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기록하지 아니함이 없다.
그리고 지사(志士)와 고인(高人 : 벼슬하지 않고 세상 물욕에 뜻을 두지 않은 고상한 사람)들의 빛나는 문구며 가운(佳韻 : 아름다운 풍치)을 두루 찾고 자세히 채집하여 소루(疏漏)함이 없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간행된 최초의 용성지는 전해 오는 것이 없다.
그 뒤 영조 28년(1752)에 이르러 숙종 때의 초간본 용성지 내용은 여지승람에 실려 있는 것이지만 이미 옛것이 되고 토지, 물산, 산천, 형승이 너무 간략하고 상세하지 못하여 새로 용성지들 간행하게 되었다.
용성지 번역본은 남원 향교에서 보관하여 오던 영조 28년(1752)에 간행 된 것을 대본으로 하여 남원문화원에서 번역(1995년)하여 옛 남원의 인문, 지리역사를 살펴보기 위한 귀중한 자료집이 되고 있다.
그간 여러차례 용성지를 참고하여 약간의 첨가되는 내용이나 또한 용성지의 번역부분들이 현대적 언어로 번역되어 활용되면서 여러 가지 문제점이 나타났고, 이로인하여 시민간 혼란과 분쟁에 이르게 된데는 나름의 이유가 충분하다고 보고 용성지의 새로운 번역사업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당시 번역사업이 추진될 때는 인문적 지식에 의해서 모든게 번역되었지만 지금은 다양한 정보매체는 물론 충분한 참고자료들이 다분하기 때문에 더욱 훌륭하게 시대적 상황에 입각한 번역이 될 것이고 더욱 많은 사람들이 활용되어 옛 남원의 영화를 찾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런데 용성지라는 최고의 명저를 저술한 그들의 업적에 대해서 고민해보고 감사한 적이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간 300여년간 다양하게 활용되었고 근거로서 그 역할을 다하는 데에 대해서 그 분들의 업적을 기리는 것이 후손으로서의 역할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던져본다. 용성지발간을 위해서 노력한 분들에 대해서 그 분들들의 노고를 기르는 표석이라도 해서 후손들이 그 업적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감사하는 장이 마련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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