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한시문학(漢詩文學)의 한 맥을 이룬 담락당(湛樂堂) 하립(河립)과 삼의당(三宜堂) 김(金)씨는 1769년 (영조45) 10월 13일 같은 해 같은 날 같은 동네인 남원부 서봉방에서 태어나, 1786년(정조10) 18세 되던 해에 결혼한 부부시인이다. 부부는 1801년(순조1) 12월에 마령면 방화리로 이사와 이 곳에서 여생을 마쳤다.
자녀는 3녀를 두었으나 장녀와 3녀는 일찍 사망하고, 41세에 얻은 아들 영진(榮進)은 효자였다. 담락당은 1830년(순조30)에, 삼의당은 1823년(순조23)에 사망하여 백운면 덕현리 한 무덤에 안장했다. 1984년 ‘담락당 하립․삼의당 김씨 부부시비'가 마이산 탑영제(塔影堤)에 세워졌으며, 부부시비(夫婦詩碑)에는 담락당의 시 <초야창화(初夜唱和)>와 삼의당의 시 <화답의 노래>가 김해강(金海剛) 시인의 번역으로 나란히 새겨져 있다.
부부의 문집은 (담락당집)과 (삼의당고)가 있으며, 1982년 전라북도 문화재 전문위원 황안웅(黃安雄)의 번역 <김삼의당 시문집(金三宜堂詩文集)>이 제일사에서 발행되기도 하였다. 부부시인을 본격적으로 연구한 국문학자는 박요순(朴堯順) 교수로, <한남어문학(韓南語文學)> (한남대학교 국어국문학회, 1985)에 게재된 논문 (삼의당과 그의 시연구)는 부부시인에 대한 총체적인 연구성과로 손꼽힌다. 부부시인의 개략적인 기술(記述)은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 (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PP․969~970)과 (진안군사)'인명록'에 필자의 집필로 등재되어 있다. 그런데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 중 '하립(河립)'과 '하립(河립)의 처(妻) 김씨(金氏)'에 대한 집필자 이름이 '한문종(韓文鍾)'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오식이다. 집필자는 이운룡 (李雲龍)임을 밝혀둔다. 본고에서는 박요순 교수의 논문 개요를 참고로 담락당과 삼의당의 시세계를 조명하고자 한다.
참고로 덧붙이면 하립(河립)의 '립‘은 '욱'이 아니라 '립'으로 훈독해야 함을 밝힌다. 하씨 문중 전래에 의하면 이는 '三日立' 곧 '립'자로서 "셋째 아들 너만은 입신양명하라"는 유지를 받아 지어진 이름이기 때문이다.
②가문(家門)
삼의당의 시가(媤家) 하(河)씨 집안은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경재(敬齋) 하연(河演)을 12대 선조로, 경기도 안산에서 살았으나 후에 남원으로 이사했다. 하씨 일문의 가계 중 특기할 만한 것은 경학(經學)에 전심했던 양반으로, 유교정신의 규범 속에서 사도(士道)를 지켜왔으니, 시부(媤父) 봉촌(鳳村)의 <계자시(戒子詩)>만 보아도 가정의 생활규범이 엄격했음을 암시해 준다. 담락당의 경우는 수차 과거에 응시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8년간 한양에서 면학할 당시 일만여 권의 장서가요 순조 때 영의정 ․전라관찰사를 지낸 두실(斗室) 심상규(沈象奎)의 집에서 유숙했기 때문에 학문적으로 그만큼 박학다문의 기회가 있었다.
한편 궁핍한 시가의 살림을 맡아 시부모를 봉양하고 형제와 친척까지 돌보아야 했던 삼의당의 고초와 회생은 효심과 형제애로 가도(家道)를 세워 나갔기 때문에, 집안에서는 물론 인근에서도 그 부도(婦道)를 칭송했으며, 남편과는 금실이 좋아 일상생활의 애환을 시문으로 화답하던 시우(詩友)이기도 했다.
③부부 시인의 시(詩)
삼의당의 시와 그 형성 배경을 보면 대략 다섯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로 그의 문필재능은 천부적이고 남다른 감수성을 지녔다. 둘째로 삼의당의 시 창작 여건은 시부와 시형제 다섯분이 모두 시문(詩文)에 뛰어났기 때문에 시창작을 하고 인정받을 수 있었다. 셋째로 삼의당의 시문학 형성과 담락당의 관계는 당시 사회의 일반적 통념을 초월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결혼 첫날밤부터 화답시(和答詩)로 인연을 맺었기 때문이다. 넷째로 삼의당이 살았던 곳의 자연환경은 그의 시형성에 영향을 끼쳤다. <촌거즉사(材居卽事)> <초당즉사(草堂卽事)>의 시는 자연에 대한 심미감을 잘 반영한 작품이다.
한편 ((담락당집))의 담락당 시 (마이산) 역시 자연환경의 영향이 컸음을 입증해 준다. 이 작품은 관아에서 현감 이지형(李趾亨)과 더불어 읊은 시이다. 다섯째로 영정대(英正代)의 사회적 여건이나 문화적 분위기는 새로운 개화의 시기였다. 실학사상이 논의되고 평민 계층의 자의식이 싹트던 때였으므로 삼의당에게도 자극이 되었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이로 보아 삼의당의 시유산(詩遺産)은 자신의 창작 능력과 주변의 여건이 작용되어 오늘에 남게 된 것을 간파할 수 있다.
④삼의당의 작품 경향
그의 시는 여류시로서 비교적 소재가 다양하다.
첫째로 애정시가 주목된다. 사랑의 대상은 남편이며, 순결한 점이 특징이다. 그의 시에서 ‘미인'은 남편인 담락당을 가리킨다.
둘째로 자연관조의 시 내용은 산천 명승과 기암괴석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당시 여성 생활권에서 소재가 선택되고 시가 이루어진 점이 특징이다. 그의 자연의식은 때로 인사(人事)와 교직하여 사유의 깊이와 서정의 농도를 더하게 한다. <(춘규사(春閨詞)> <춘경(春景)> <추규사(秋閨詞)> <추야월(秋夜月)> 그러한 예의 작품들이다.
셋째로 전원생활의 시는 자연의 미세한 사물과 현상까지도 섬세하게 관조되고 생생하게 작품화된 것이 특징이다. 담닥당이 경영하는 농사에 무심할 수 없었을 것이고, 그것이 농가(農歌)를 짓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만큼 그의 전원시는 사실적이고 체험적이다.
넷째로 효․권학․우애․국가의식 등 일상생활에서 생각나는 내용들이 작품화되어 있다. 이런 시들에서는 다만 어떠한 사태나 현상을 전개시켜 보여주는데에 그 특징이 있다.
이것으로 보아 삼의당의 시의식은 소일의 방편이나 여기로서가 아닌, 목적의식이 뚜렷했음을 엿보게 된다. 일례로 연시(聯詩)가 많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춘규사> 외에 18편의 시가 연시라는 것만 보아도 짐작되는 문제이다. 그의 시는 풍부한 감성에 의하여 시상(詩想)의 환기, 소재의 수용이나 처리 등에 관심을 기울인 듯하다. 이는 조선시대 여인이 지켜야 할 규범과 그 법도 안에서 순응하고자 자신을 희생했던 의지가 그러한 결과를 낳게 된 것이라고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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