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진정한 기쁨은 스스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목적을 위해 자신이 쓰는 것이다. 곧 꺼져버릴 촛불이 아니라 일종의 찬란한 횃불로”.
나는 남원시 주생면 정송리 47번지에서 아버지 양해득씨와 어머니 정봉심여사 사이에서 4남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났던 60년대는 가난으로 배고픔을 안 느껴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 당시 무밥, 꽁보리밥은 필수였고 식사대용으로 감자, 고구마도 많이 먹어 봤을 것이다.
나에게는 가난의 배고픔보다 더 싫었던 것은 가부장적인 사회 구조 속에 남존여비의 사상이었다. 아들들은 공부하러 더 좋은 학교에 진학하고 딸들은 일이나 하고 그 당시 내 친구들도 오빠나 남동생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정든 고향을 등지고 서울로, 인천으로 고장을 찾아 떠났었다.
나역시 초등학교 졸업하고 전주에서 사촌고모가 운영하는 편물공장에 돈 벌기 위해 갔다. 특히 엄마는 큰며느리도 아니면서 할머니, 할아버지를 모시고 살면서 뜻에 따를 수 밖에 없었기에 나를 가슴에이는 심정으로 보내면서 가서해보고 힘들면 오라는 것이다. 어른들의 말씀이 법인양 고향을 떠나 편물을 배워보려 노력했지만 난 오로지 공부고 싶을 뿐.
오빠가 일하면서 공부하라고 첫걸음이란 책을 몇 권 사주었는데 그 책만 가지고 엄마 곁으로 도망 왔다.
언제나 배움에서의 꿈은 나를 바꿔놓았다.
그 당시 인근부대(7733)에서 의식있는 군종사병들이 야학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제3기생을 모집한다며 우리집을 방문했다. 나에게도 행운의 기회가 왔다. 나는 용기를 내어 입학을 하여 낮에는 일하고 밤에 열심히 공부하여 중학과정을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어둡고 무서운 밤길!
포장도 안 된 자갈길, 또래들과 함께 3Km를 걸어 다니며 나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옥고를 치룬 유관순을 많이 생각했다. 드디어 남원여고 합격!
입학을 며칠 앞두고 나는 고심에 빠졌었다.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던 나의 처지와 사회분위기가 몇 년 사이에 나아질 일이 없다.
도저히 진학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KBS남원방송국에서 “오늘을 산다”, 프로그램을 통해 후원자를 찾았다. 그러나 그때도 지금처럼 어려운 시기여서 7733부대 장교들이 장학회를 구성하여 3년간 학비를 지원해 주기로 약속해주셨다. 정말고마우신 분들이다.
지금도 가끔 그분들과 찍은 사진을 보며 그분들의 뜻에 보답하기 위해 부지런히 살고 있다.
하지만 여고시절 나의 생활은 힘들었다. 5Km거리를 밤에 메모해 두었던 단어장을 들고 아침 6시 30분에 출발해야 8시 등교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자습서, 참고서 한권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여고시절을 보냈다.
학업성적은 원하는 대로 향상되지 않지, 시험결과가 나오면 통신표와 함께 감사의 편지를 써서 장학회에 보내는 심정은 자퇴를 해버리고 싶을 정도로 부담스러웠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아무튼 꿈 많은 여고시절을 보내고 남자도 아닌 여자가 감히 대학이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또 대학을 가고 싶었지만 자력으로 다니고 싶어 여고를 졸업하고 한국새싹교육원 보육교사 과정을 마치고 평일에는 새마을 유아원,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주말과 일요일엔 인근 한센병환자들이 살고 있는 교회에서 아이들을 지도하는 봉사를 하며 또 틈나는 대로 예식장엣 웨딩마치를 쳐주면서 피아노 레슨을 하면서 처녀시절을 대부분 주변을 돌보는데 주력했다.
많은 봉사를 하면서 또 어린이들을 돌보면서 야학시절 어려운 군복무에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사랑으로 몸소 실천 봉사하신 선생님들의 희생을 생각하며 작은 봉사지만 기쁘게 담당하며 살았다.
지금도 내 귀에 생생하다. 저희들이 커서 선생님들께 무엇으로 보답 할까요
“너희들도 커서 사회 나가면 받은 만큼 사회에 환원하면서 살아라. 시간이 많으면 시간으로, 돈이 많으면 돈으로, 기술이 있으면 기술로...
지금 지역에서 크고 작은 일에 열심히 참여하면서 일할 수 있는 것은 항상 그때 그시절 선생님의 목소리들이 귓가에 쟁쟁하기 때문이다.
27살 4월 5일계 결혼(87. 4. 5)
지금의 나의 결혼생활은 행복하다. 어느 누구 부럽지 않다. 6살 때부터 태권도를 시작하여 지금까지 태권도로 일생을 보내고 태권도장을 운영하는 남편과 고등학교 3년인 아들 지훈, 중2학년 딸 예슬과의 생활은 활기가 넘친다.
돈, 명예, 권력 얼마나 소중한 것들인가 하지만 우리 가족은 남들에게 관심 갖고 남들에게 배려하고, 남들에게 지지받고 살고 싶은게 가정의 철학이다.
인간이 살면서 어려움이 없다는 것은 삶이 무의미하다고 본다.
결혼하면서 결혼 10년은 꼭 자녀교육에 투자하기로 내 자신과의 약속을 했다. 모유를 먹이고 꼭 아들, 딸들 옆에서 어떤 모진풍파가 닥쳐와도 떨어지지 않으리라고..
나의 대학시절의 부름
어느 정도 자녀를 키우고 나니 나란 존재를 발견하게 되었다. 많은 사회단체의 손짓, 삼십대 마지막 난 바른선거시민모임 회장이라는 이름으로 첫발을 내딛었다. 어느 정당 정파에 치우치지 않는 깨끗한 사람으로 올바른선거문화를 정착시켜 보겠다고 여성으로만 구성도니 61명의 회원과 98, 6. 21 창립대회를 갖고 현재까지 열심히 활동하던 중 여성단체, 사회봉사단체에 다양한 사회활동에 참여하면서 다시 한번 배움의 꿈을 재확인하고 싶었다.
남성중심의 사회구조속에 껴 맞추기의 나의 활동이 실기도 했다. 무엇이든지 주인의식을 가지고 열심히 하기에는 힘이 필요한데 그것은 돈과 배움 중 나에겐 배움의 기회가 필요했기 때문 서남대경영대학원 여성지도자과정을 마치고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하여 못다한 공부를 했다. 자원봉사활동에 대한 전문지식의 필요성을 느껴 지난 2004년 2월 학부를 졸업하며 졸업장을 받는 수간 셋방살이에서 전전긍긍하다 좋은 집을 한채 산 기쁨을 맛본 사람처럼 학벌에 대한 컴플렉스가 심했던 나도 그 기쁨을 맛보았다. 자신감을 파괴시켰었다.
40이 되어 대학을 다니면서 자녀들과 남편에게 무척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가족의 협조 없이는 ...그야말로 우리가족은 가족순기능의 표본으로 자부하고 싶다.
수업 중에 집에서 전화가 오면 가슴이 뜨끔 뜨끔했다. 혹시나 무슨 일이... 열심히 사회활동하면서 또 여성활동가로서 주부로서, 아내로서 엄마로서 수강을 하면서 더 큰 목표를 향하여 학부는 사회복지를 전공했지만 이것으로는 부족하여 석사과정을 국문학을 전공중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많은 글을 통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고 싶다
요즈음 세상 살기 힘들다고 다 아우성이다. 많은 사회문제와 개인이기주의의 팽배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허덕이고 있다.
사람이 부모 품에서 성장하면서 자신의 목표를 설정하고 목표를 향해 달린다. 그러나 그 실천은 많은 노력과 희생을 감수하면서 피나는 노력이 없이는 물거품이 되고 만다. 나는 지금도 달리고 있다.
걷는 사람이 나와 더불어 달리고 싶다면 도아행하고 싶다.
더불어 사는 우리 삶의 전을 만들고자 그날이 올 때까지....
인생의 전정한 기쁨은 스스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목적을 위해 자신의 쓰는 것이다.
세상이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며 배 아파하고 열병을 앓는 이기적인 고깃덩어리는 진정한 기쁨을 얻을 수 없다.
나는 나의 인생이 전체 사회 속에 속해 있으며 내가 살아있는 동안 사회을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나의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죽을 때 내 자신이 완전하게 소진된 생태이기를 원한다. 내가 더 열심히 봉사할 수 록 나는 더 오래 살아남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인생을 즐긴다. 나에게 인생은 곧 꺼져버릴 촛불이 아니라 일종의 찬란한 횃불이다.
이 횃불을 다음세대에 넘겨주기 앞서 내가 들고 있는 동안은 되도록 환히 타오르게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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