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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들을 아시나요?

글쓴이 : 직협펌 날짜 : 2009-08-16 (일) 00:40 조회 : 1246
이분들을 아시나요?

"실패한 인간...아무도 내 제사 지내지 말라"
독립기지 건설자-임시정부 '창업자'의 최후
[광복 64주년 독립운동가 재조명②] 매혹적인 두 독립선열, 이상설과 신규식
 
09.08.15 13:44 ㅣ최종 업데이트 09.08.15 13:56  김갑수 (kim gabsoo) 
 

이상설, 광복, 독립운동, 신규식, 이승만
 
<오마이뉴스>는 광복 64주년을 맞아 독립운동가 가운데 일반인들에게 덜 알려져 있거나 또는 재조명이 필요한 독립운동가 네 분을 선정하여 이들의 항일투쟁 활동을 되돌아보는 기획을 마련했다. 대상자는 상해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예관 신규식 선생, '헤이그 밀사' 중 1인인 이상설 선생, 그리고 독립운동 당시 최고령 투사였던 강우규 의사와 일제하 여섯 차례 옥고를 치른 의열단원 김시현 의사 등 네 분이다. 집필은 역사소설가 김갑수씨와 친일문제 전문가 정운현씨가 맡았다. <편집자말> 
 

 
 
▲ 지난해 8월15일 오후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열린 '광복63주년기념 8·15민족통일대회'에서 참가자들이 한반도기를 흔들며 광복절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 권우성  광복절
 
 


 

어언 64돌 광복절을 맞이하게 되었다. 우리가 8·15해방을 맞이한 것은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미국에 항복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해방은 전적으로 선열의 공로라고 믿는 것은 일면 낭만적이거나 아니면 상투적인 생각일 수가 있다고 본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외재적 요인과 내재적 요인이 함께 작용한다. 그러므로 2차대전의 세계정세가 8·15해방의 외재적 요인이라면, 선열들의 독립투쟁은 8·15해방의 내재적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2차대전의 와중에 미·영 등의 열강이 한국을 전후(戰後)에 독립시키기로 선뜻 결정하게 된 데에는 한국인의 대일독립투쟁이 부단히 전개되어 왔다는 점이 참작된 것이었다.(강만길, <20세기 우리 역사> 참조)

 

한국은 제국주의 침략을 받은 나라 중 가장 격렬하고도 끈질긴 저항을 보인 나라에 속한다. 공식적인 독립운동가의 숫자만 해도 1만 명이 넘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국가보훈처 지정 2008.3.1 현재 1만134명) 그 중에는 40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안중근 의사 가문, 3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동농 김가진 가문도 있다.

 

불행히도 8·15해방은 민족 분단과 한국전쟁으로 연결되었다. 친일 청산은 번번이 무산된 채 그 후예들의 득세가 여전한 것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이런 점으로 본다면 8·15는 '착잡한 경축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다 '건국절' 운운하는 뉴라이트와 정부· 여당 사람들의 몰 역사성은 우리를 한층 더 착잡하게 만든다.

 

하지만 오늘은 이런 착잡함을 뒤로 하고 조국독립을 위해 정말 매혹적인 삶을 살다가 비장하게 죽음을 맞이한 선열 두 분을 생각해 보려 한다. 이상설과 신규식 두 분은 참으로 순수하고 명민한 지도자였다. 실제적인 독립운동의 성과 면에서도 누구보다 월등하다고 할 수 있다.

 

두 분은 조선 명문 가문의 후손들이었다. 따라서 이른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치열하게 실천한 분들이기도 하다. 참고로 필자는 민족진영 3대 독립운동가로 백범 김구와 이 두 분을 꼽는다는 점을 밝힌다.

 

[1910년대 최상 독립운동가 이상설] "아무도 내 제사를 지내지 마시오"

 

 
 
▲ 이상설 선생. 
ⓒ .  이상설
 
 

이상설(1870~1917)은 1894년 과거 문과에 급제하여, '율곡 이이를 조술(祖述)할 수 있는 학자'라는 평가를 받았을 정도로 명민한 문인이었다. 그는 성균관 교수를 역임하고 궁내부 특진관을 맡고 있을 때, 일본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의 저의와 부당성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상소를 올려 고종으로 하여금 일본의 요구를 물리치도록 했다.

 

그는 의정부 참찬으로서 을사늑약의 체결을 저지하기 위해 회의장 문을 밀치고 들어가려다 일본 헌병의 제지를 받게 되자 헌병 책임자의 어깨를 장죽으로 후려치며 분통을 터트렸다. 그는 고종에게 사직(社稷)과 함께 할 각오로 을사5적을 처단하고 5조약을 파기하라는 상소를 올린다. 또한 그는 종로 거리로 나가 군중을 상대로 민영환의 순국 자결을 알리는 가두연설을 하기도 하는 등 말 그대로 행동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이상설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위종이 포함된 밀사단의 정사(正使)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임무를 마친 그는 총독부가 궐석재판으로 사형을 선고해 놓고 있는 조국에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1908년 콜로라도 덴버에서 개최된 애국동지회의에 연해주 대표로 참가한다. 이 자리에서 그는 자기보다 다섯 살 어린 이승만을 만난다. 당시 이승만은 국내에서 독립협회 사건으로 복역하다가 민영환의 주선으로 석방되어 미국으로 망명, 조지워싱턴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이상설은 연해주 대표로서의 소임 수행을 위해 미국을 떠나게 된다. 이것이 같은 연해주 대표였던 이승만과 다른 점이었다. 이것은 이상설의 특징이라기보다는 이승만의 성향을 알게 해주는 보이지 않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언제나 이승만은 독립운동보다는 자신의 영향력을 키우는 것을 우선했으며, 그가 독립운동 내내 취했던 노선은 미국의 지지를 얻어내어 독립하는 방법 외에 별다른 것이 없었다.

 

이상설은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이승희, 김학만, 정순만 등과 함께 흥개호 남쪽 봉밀산에 땅을 샀다. 그들은 100여 독립운동가 가정을 규합하여 이주케 함으로써 한국 최초의 독립운동기지라고 할 수 있는 '한흥동'을 건설했다.

 

그는 일제가 조국을 병탄하자 독립결의선언서를 작성, 간도와 연해주 일대의 교포들을 규합했다. 그는 의병장 유인석을 필두로 하여 8624명의 독립운동가가 서명하는 거사를 주도하기도 했다. 이어 그는 선언서를 중국, 미국, 러시아 등의 정부에 우송했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이름을 간직하고 한국인이라는 지위를 결코 잃지 않을 것을 결의한다. 우리의 과업이 아무리 어렵다 할지라도 우리는 목적을 이룰 때까지 손에 무기를 들고 투쟁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자유와 독립을 위해 죽을 의지를 갖고 있음을 내외에 천명한다."

 

독립운동 통합전선 구축에 관심... '13도의군' 결성

 

 
 
▲ 헤이그 밀사. 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 .  헤이그밀사
 
 

영어·불어·러시아어를 잘 알았던 이상설은 놀랍게 수학에도 천부적 능력이 있었다. 그는 한국 최초의 근대 수학서인 <산술신서>를 출간해서 청년들을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 

 

그는 언제나 독립운동의 통합전선 구축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그는 의병 세력을 규합하여 '13도의군'을 결성하기도 했다. 그는 권업회 결성과 <권업신문> 운영, 광복군 사관학교 설립 운영, 그리고 대한광복군 정부 수립 등 독립운동사에 굵은 글씨로 기록되어야 할 주요한 사업들을 성사시켰다. 그는 이동휘, 이동녕, 정재관 등의 추대를 받아 대한광복군 정부의 정통령으로 취임하기도 했다.

 

이후 이상설은 국내 진공을 목표로 중국 대륙 내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조직을 구축하기 위해 헌신하지만 국제정세의 변화 등으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상심이 워낙 컸던 탓인지 그는 병을 얻고 말았다. 그는 동지들의 주선으로 러시아 니콜리스크의 한 허름한 병원에 입원했다.

 

순수한 독립운동가의 좌절된 상처는 너무나 깊었다. 그는 회복되지 못한 채 이국 낯선 도시의 소독내 나는 병실에서 48세의 일기로 눈을 감았다. 그의 유해는 화장되어 러시아의 차가운 강에 재로 흩뿌려졌다. 그가 남긴 유언은 참으로 침울하고 뼈아프다.

 

"광복을 못 이루고 죽은 자가 무슨 낯으로 고혼인들 조국에 가겠소? 나는 실패한 인간이니 내 몸과 유품을 전부 불태우시오. 그 재도 모두 바다에 날리시오. 아무도 내 제사를 지내지 마시오."

 

[임시정부 창업 1공로자 신규식] 단말마의 비명 "정부, 정부!"

 

 
 
▲ 예관 신규식 선생. 
ⓒ .  신규식
 
 

을사늑약 직후 25세 청년 신규식은 종로에서 이상설의 가두연설을 듣고 왔다. 그는 충정공 민영환의 '2천만 동포에게 고함'을 처절히 읽고 나서, 독약 아고니친을 성큼 입에 넣었다. 그는 민충정공을 따라 순국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부인 조정완의 슬기로운 구급으로 목숨을 건진다.
 

다만 약발이 시신경을 건드려 사시(斜視)가 되고 만다. 사시를 우리말로 하면 '흘겨보기'기 된다. 그리고 흘겨보기를 다른 한자어로 바꾸면 '예관(睨觀)'이 된다. 그날로부터 신규식은 자기의 호를 예관으로 정해 썼다. 예관 신규식, 그는 처참히 망해 버린 조국을 정시하기가 싫어 사시가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충청도 문의에서 태어난 신규식(1879~1922)은 문무를 겸비한 소년으로 성장했다. 그는 한성외국어학교와 경사육군사관학교를 다녔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문과 무가 함께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을사늑약 후 자살을 기도했던 그는 끝내 경술국치로 나라가 결딴나자 분연히 총을 들고 서소문으로 나가 구식군대의 봉기에 가담했다. 그의 옆에는 훗날 독립군 장군이 되는 노백린이 있었다.

 

의병투쟁은 실패로 끝나고 그의 슬픔은 깊어만 갔다. 남편이 또다시 자살할 것이 두려워진 아내 조정완은 친정에 가서 아버지와 담판하여 자금을 만들어냈다. 그녀의 아버지는 한양 조씨 종손이자 경기도 부호였다.

 

그 해 꽃잎에 흙먼지가 이는 봄날, 신규식을 태운 준마는 북으로 달린다. 그의 말에는 지금 환산으로 무려 13억원의 현금 자루가 실려 있었다. 그가 말에서 내린 곳은 중국 땅 단동이 바라보이는 신의주였다. 그의 아이디어에는 상해가 박혀 있었다.

 

기차와 배를 번갈아 타며 상해 진입에 성공한 그는 가져간 돈의 절반을 손문의 혁명대에 과감히 '배팅'했다. 이후 그는 손문은 물론 중국 굴지의 혁명가들인 황홍, 송교인, 진기미, 당계요 등과 우호를 돈독히 했다. 그는 상해에 박달학원을 만들어 독립운동가들을 길러내기 시작했다.

 

조선 청년 100명을 무관학교에 보내고 지원한 신규식

 

신규식은 100명에 가까운 조선 청년을 중국 각지의 무관학교에 보내고 지원했다. 이어서 그는 '동제사'를 결성했다. 동제사란 '물을 함께 건너자'는 뜻의 이름이다. 바로 이 동제사가 없었더라면 몇 해 후 임시정부가 조직되지 못했을 거라고 본다. 요컨대 신규식이 만든 동제사는 오늘날 우리가 훈장처럼 여기는 상해임시정부의 모태가 된 조직이었다.

 

신규식의 집은 독립투사들의 기숙사나 다름없었다. 박은식, 신채호 등의 기라성들이 그의 집에 기식하며 적지 않은 경제적 원조를 받았다. 마침내 그는 대망의 임시정부를 결성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는 일체의 보직을 사양했다. 그 전에 간도의 거목 이상설과 제휴하여 당을 만들었을 때에도 상해 지부장 외의 모든 요직을 다 양보했던 적이 있었다.

 

신규식은 명저 <한국혼>을 저술했다. 이 원고는 상해 유수 출판사에서 자원 출간되었다. 당시 중국인들에게 예관은 손문과 필적하는 인물로 존경을 받았다.

 

유감스럽게도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의 직무유기가 시작되었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나타난 임시정부의 분열은 그에게 신경쇠약을 일으키도록 만들었다. 결국 이승만이 임시정부를 방기하고 미국으로 떠나버리면서 신규식에게 전권을 맡겼다. 사실 애초부터 신규식이 맡았어야 하는 일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는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겸 법무장관 직을 받아, 거덜 난 임시정부를 수습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다. 아울러 그는 박찬익, 민필호 등을 대동하여 손문의 광동정부를 방문했다. 손문은 신규식을 환대하면서 임시정부를 비록 약식이지만 승인해 주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임시정부가 이루어 낸 전무후무한 외교적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파리강회회의 진입 실패로 임시정부의 분열과 반목이 다시 도지게 된다. 임시정부가 와해 위기에 빠지자 신규식은 매일 밤 통곡으로 지새웠다. 그는 잘 우는 기질과 약간 염세적인 세계관을 타고난 것 같다. 설상가상으로 임시정부를 지원해 주던 손문의 광동정부가 진형명의 반란으로 어려운 국면에 처하게 되자 그의 좌절은 더욱 깊어져 갔다.

 

신용우-신규식-민필호-김준엽... 4대에 걸친 독립운동

 

그는 갑자기 식음을 전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식음 전폐 후 며칠 후부터 유령 같은 헛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나에게는 죄가 없소이다. 나에게는 죄가 없소이다."

 

임시정부의 분열과 반목을 보고 누군가를 탓하고도 싶었겠지만, 그는 생전 그것을 안으로 삼키며 자기에게는 죄가 없다는 말로 대신하지 않았는가 싶다. 그로부터 그가 허락한 것은 물 몇 모금뿐이었다. 이후 그는 보름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벌떡 일어나 "정부, 정부"라고 단말마의 비명을 토하고는 영구히 잠들어 버렸다. 그 비명은 너무도 모호해서 아무도 그 뜻을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는 임시정부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유언을 남긴 것이었다.

 

그의 부친 신용우 공은 정2품 의금부도사였는데 나라가 망하자 홀연히 의병장으로 나선 인물이다. 신규식의 동생 건식은 상해에서 독립운동가로 활약했으며, 신규식의 조카 신필호는 국내에서 세브란스 의사를 하며 독립운동가를 은신시키고 자금 등을 지원했다.

 

신규식에게는 외동딸 명호가 있었는데 훗날 이 소녀와 결혼한 사람이 민필호이다. 신규식의 사위가 된 민필호는 나중에 김구 주석의 판공실장을 맡는다. 민필호는 중국군 고급장교 신분을 유지하며 임시정부의 자금 조달을 도맡기도 했다. 그는 중경으로 쫓겨 간 임시정부의 청사를 마련했으며 해방 후까지 임시정부를 지켰다.

 

민필호에게도 딸이 생겼다. 딸의 이름은 민영주였는데 그녀는 독립군 지대장 이범석의 비서를 하다가, 학병에서 탈출하여 중경임시정부를 찾아온 청년 김준엽을 만나 결혼하게 된다. 신용우 - 신규식 부자(父子), 신규식의 사위 민필호 그리고 민필호의 사위 김준엽, 이렇게 4대에 걸쳐 독립운동을 한 예는 세계 역사에도 없다고 한다.

출처 : "실패한 인간...아무도 내 제사 지내지 말라"
독립기지 건설자-임시정부 '창업자'의 최후 - 오마이뉴스
 
 

항일투쟁 ‘16년 옥고’ 불구 훈장 못받은 김시현 의사
요즘 내 생각들 2009/08/15 08:00 정운현
<오마이뉴스>는 광복 64주년을 맞아 독립운동가 가운데 일반인들에게 덜 알려져 있거나 또는 재조명이 필요한 독립운동가 네 분을 선정하여 이들의 항일투쟁 활동을 되돌아보는 기획을 마련했다. 대상자는 상해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예관 신규식 선생, ‘헤이그 밀사’ 중 1인인 이상설 선생, 그리고 독립운동 당시 최고령 투사였던 강우규 의사와 일제하 여섯 차례 옥고를 치른 의열단원 김시현 의사 등 네 분이다. 집필은 역사소설가 김갑수 씨와 친일문제 전문가 정운현 씨가 맡았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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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국사범’이랄 수 있는 독립운동가들에게 갖은 고문과 악행을 자행했다. 최근 재심을 통한 명예회복 움직임이 일고 있는 죽산 조봉암 선생의 경우 일경에 체포돼 손톱이 뽑히는 고문을 당하였고, 신의주 감옥에서 7년간 복역하면서 혹독한 추위 속에 동상으로 손가락 7개를 잘라내기도 했다. 또 유학자 출신의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 선생은 일경의 고문으로 두 다리를 쓸 수 없는 불구가 돼 평생 앉은뱅이 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생전에 무려 일곱 차례에 걸쳐 총 24년간 감옥살이를 한 초인적인 항일투사가 있다. 그 가운데 여섯 차례, 기간으로 16년에 걸친 감옥살이는 일제하에서 항일투쟁을 하다가 일경에 체포돼서였다( 나머지 한 차례, (수감 기간은 약 8년)는 해방 후 이승만 독재정권 하에서였다.) 이런 그를 두고 혹자들은 ‘한국 최후의 레지스탕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의열단원 출신으로, 1923년 소위 ‘황옥(黃鈺)경부사건’의 주모자로 체포된 김시현(金始顯) 의사가 그 주인공이다.



 
말년의 김시현 의사


김 의사는 ‘거사-체포-투옥-석방’을 수 차례 거듭했음에도 불구하고 해방 때까지 변절하지 않고 일관된 항일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김 의사에 대한 독립유공 포상이 아직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혹 김 의사의 항일투쟁 행적에 문제가 있어서인가? 그건 아니다. 해방 후 김 의사와 관련된 정치사건의 ‘전과딱지’가 김 의사의 독립유공 포상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김 의사는 해방 전후를 일관하여 투사의 삶을 살았다.

김 의사는 1883년 독립운동가의 본산이랄 수 있는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 김 의사를 기억하는 고향 사람들 가운데는 먼저 그의 ‘혀짧은 소리’를 떠올리곤 한다. 이는 김 의사가 일경으로부터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 비밀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혀를 깨물러 발음이 부자연스런 데서 생긴 것이다. 김 의사의 원래 호는 학우(鶴右)였는데 김 의사를 수사하던 일본인 검사가 “(너의 독립운동은)도대체 무엇을 구하려는가? 차라리 하구(何求)가 좋겠다”고 빈정대자 아예 호를 ‘하구(何求)’로 바꾸었다고 한다.

지식인 출신 투사... 의열단 사건으로 5년여 옥살이

김 의사는 항일투사 가운데 지식인 출신이다. 29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明治)대학 전문부를 거쳐 법학과를 만학으로 다니다가 1917년 귀국한 김 의사는 경북 상주에서 3·1의거 와중에 일경에 체포된 후 본격적인 항일투쟁 대열에 들어섰다. 이 사건 직후 상하이로 망명했다가 지린(吉林)으로 가서 약산 김원봉이 결성한 ‘의열단’에 참여해 군자금과 단원 모집을 위해 국내로 침투하였다. 이로부터 시작된 그의 국내 침투와 피체, 망명은 쉼 없이 해방을 맞는 날까지 마치 시계바늘 돌듯 계속되었다.

1920년 9월경 의열단의 제1차 국내폭탄반입에 가담했다가 대구에서 체포된 김 의사는 대구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렀는데, 첫 감옥살이였던 셈이다. 출옥하자마자 다시 상하이로 망명한 김 의사는 안병찬의 소개로 고려공산당에 입당하고,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회의에 참가하였다. 여기서 김 의사는 평생의 동지요, 반려자인 ‘신여성’ 권애라(權愛羅·73년 작고·건국훈장 애국장)를 만났는데, 상하이로 돌아온 후 두 사람은 정식 결혼하였다.

의열단은 1923년 2월 독립운동사상 최대 규모의 무기밀반입 거사를 기획하였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통해 총독부 청사, 동척, 매일신보 등을 폭파하고 총독부 고관 등을 처단할 계획이었다. 2월초 김 의사는 톈진에서 김원봉으로부터 다량의 폭탄과 무기, 단재 신채호가 작성한 ‘조선혁명선언’ 등을 전달받았다. 그리고는 평소 자신을 추종하던 황옥(黃鈺) 경부(警部, 현 경정)의 도움을 받아 이를 국내로 반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이후에 발생하였다. 일행 중에 밀고자가 생겨 관련자들이 속속 체포되었고 김 의사 역시 검거돼 10년형을 선고(복역기간은 5년 5개월)받았다. 이른바 '의열단 사건'(또는 ‘황옥경부사건’)이다.


 
'의열단사건'으로 구속돼 5년 5개월 감옥을 살고 나올 당시의 신문 보도 내용


한편 1930년대 김 의사의 활동은 군사간부학교 학생모집과 배신자 처단, 투옥 생활의 연속이었다. ‘황옥경부사건’으로 1929년 대구형무소에서 출옥한 김 의사는 곧바로 지린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독립군양성소 설립을 추진하다가 중국 관헌에게 체포돼 3개월 동안 고초를 겪었다. 그 후 중국 본토로 이동하여 1932년 의열단 지도부와 재결합하였는데, 당시 의열단은 난징에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설립, 초급장교를 양성하고 있었다. 김 의사는 베이징 지역에서 학생모집 활동을 하는 한편 동지와 함께 한삭평(韓朔平)이라는 배신자를 처단하러 나섰다가 살인미수혐의로 체포돼 1935년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일본 나가사키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39년 9월 출옥 후 이듬해 4월 다시 베이징으로 건너갔다.

1940년대에도 김 의사는 역시 항일투쟁과 뒤이은 피체, 구속, 그리고 감옥생활을 다시 반복하였다. 1941년에 국내와 베이징을 오가며 항일투쟁을 벌이다 체포돼 일본영사관 구치감에서 약 1년간 미결수로 구금돼 있었다. 이후 경성 헌병대로 이감됐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난 김 의사는 또다시 베이징으로 탈출하였고, 항일민족전선군을 조직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다가 1944년 베이징 헌병대에 다시 체포된 김 의사는 1년간 수감생활을 하다가 1945년 서울로 이송되었고,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하면서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되었다. 김 의사는 일생의 절반을 감옥에서 보냈다.

일제하 항일투쟁, 이승만 정권에선 반독재투쟁

한편 해방 후 김 의사는 1950년 5·10선거에서 경북 안동 갑구에서 민주국민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제2대 민의원에 당선되었다. 일제하 항일투사에서 정치가로 변신한 김 의사는 이승만 독재정권 하에서 다시 반독재 투쟁에 나섰다. 제2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이승만이 백골단 등을 동원해 각종 테러를 자행하자 김 의사는 동지 유시태(柳時泰)와 함께 이승만을 처단하기로 결심하였다. 특히 김 의사는 백범 김구 선생의 죽음이 이승만의 지시로 이뤄졌다고 믿고 응징할 생각도 같이 갖고 있었다. 

1952년 6월 25일, 피난지 부산에서 6·25 기념식 및 북진결의대회가 열렸다. 김 의사와 모의한 유시태는 모자 속에 권총을 숨긴 채 행사장에 들어거 이승만 대통령 저격을 시도하였으나 권총 불발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 일로 '공범' 김 의사는 사형선고를 받고 복역 중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그러던 중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후 복역 만7년 10개월만인 1960년 4월 28일 석방되었고, 두 달 뒤인 6월 25일 특별사면 되었다. 김 의사는 1966년 서울 불광동 자택에서 83세를 일기로 쓸쓸한 최후를 맞았다.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으며, 묘소는 경북 예천 선영에 마련됐다.


 
4.19혁명 당시 고교생들이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김시현 의사는 집안 전체가 독립운동가 출신이다. 김 의사의 부친은 구한말의병활동을 하였으며, 둘째 동생 정현(禎顯·건국훈장 애족장)씨는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관동군에게 처형돼 유해조차 찾지 못한 상황이다. 김 의사가 평생 ‘동지’라고 부른 아내 권애라 여사 역시 독립운동가 출신이다. 1897년 경기도 강화에서 출생한 권 여사는 개성 호수돈여학교 재학 중 3·1의거에 참가, 6월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그 후 이화학당을 졸업 후 상하이 애국부인회 등에서 활약하였으며, 신징(新京)감옥에서 해방을 맞았다. 1993년에 타계한 권 여사는 1990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4등급)을 추서받았다.

한편 김 의사는 뚜렷한 독립운동 공적에도 불구하고 서훈은 물론 추모단체나 기념물 하나 없는 실정이다. 이는 ‘이승만대통령 암살미수사건’ 전과 때문인데, 관련 규정에는 ‘3년 이상 징역이나 금고형을 받은 자는 포상 받을 수 없다’고 돼 있다. 몇 년 전에 타계한 김 의사의 아들 김봉년(金峯年)씨는 생전에 “부친의 이승만 전 대통령 암살미수사건 관련부분은 당국으로부터 특별사면을 받은 만큼 원인무효가 됐다고 본다”며 “그동안 보훈처·청와대 등에 진정해봤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어 현재 서울 행정법원에 행정소송을 제기해놓은 상태”라고 필자에게 밝힌 바 있다.

일제 때는 국내외를 오가며 항일투쟁을 하다가 반평생을 감옥에서 보냈고, 해방 후에는 반독재 투쟁을 벌이다 다시 근 8년을 감옥에서 보낸 김시현 의사. 혁명가로서의 그의 삶은 곡절 많은 우리 현대사의 한 봉우리에서 찬연히 빛나고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명예회복은 여전히 요원한 실정이다. 실정법의 틀에 갇혀 한 치의 노력은커녕 꼼짝달싹도 하지 않는 게 우리 정부당국의 오랜 버릇이다. 이제 그의 고난과 역경의 삶을 기록하려는 사람도 없다. 낯선 이름이 돼버린 그의 이름을 기억하려는 사람은 더더욱 많지 않다. 그의 이야기는 다만 시리고 아픈 개인사로만 구전(口傳)돼 통한과 울분을 자아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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