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의 정려(旌閭)유산과 향토문화진흥
박찬용 (남원문화원 사무국장)
1. 들어가는 말
예로부터 지리산 춘향고을 남원(南原)은 지역적으로 영호남의 중심지요 전라남북도를 총괄하여 최고의 선비의 고장답게 한국 고전문학과 선비문화의 성지이자 충효열예(忠孝烈禮)의 고장으로서 조선시대부터 각종 문헌(文獻)에 지리산, 섬진강문화권을 대표하는 많은 과거급제자가 있었다고 기록되고 있을 정도로 그 향토문화적인 가치가 컸다.
특히 조선시대부터 ‘국가에 충성하고 목숨을 건 가족과 가정을 지져왔던 남원의 선비’가 많았음은 역사가를 비롯한 모두가 아는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중앙집권적 봉건사회를 지향했던 조선시대의 사회적 최고집권층인 왕조로부터 대표적인 정려를 받은 지역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을 정도로 정려유산이 많다.
남원에 전승되어 온 문화유산 중에 정려문은 현재까지 수백점이 바로 실제적인 고증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당연히 남원의 정려문은 조사의 시대적 가치가 컸음이 증명(證明)되고 있으며 그에 따라 정려유산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의 필요성은 더더욱 확산되고 있다.
정려는 원래 조선시대에 와서 국가에서 지역의 자랑할 만한 美風良俗(미풍양속)을 장려하기 위해 충효열의 실천자에게 국가적인 관작을 제수하거나 정려를 명했으며 살던 동네에 붉은 칠을 한 정문을 세워 象徵的(상징적)인 기념물이 되도록 한 것을 통칭하는 개념이다.
남원은 조선시대에 남원도호부가 설치된 지방행정의 중심지이자 호남지방 핵심적인 행정과 교통, 선비문화의 중심지였다. 이번 조사에서 정려각과 정려유산은 142점으로 1차적으로 밝혀졌으며 確認(확인)되지 못하고 있는 정려유산 역시 약 50여점 등이 보이는 등 다수가 존재하고 있다.
이런 조사내용의 숫자만 보더라도 남원의 정려유산은 호남을 비롯하여 전북지역에서도 가장 많은 숫자의 유산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따라서 남원의 정려문은 전국에서도 최상위 수준의 정려비와 정려문을 포함하여 그 전통성과 지역의 정체성에서 정려 유산이 차지하는 문화적 가치가 깊이 있게 다수 보유하고 있음을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조사된 정려는 공통적인 특징으로 조선 태조의 정려정책(旌閭政策) 반포 이후에 설치된 조선조의 건립식이 대부분이지만 아쉽게도 마을 문중에서 세운 정려각과 석판 정려문도 다수 확인되었다. 거기에다 18세기 이후에는 정려의 진정성에 흠집을 내거나 많은 논란을 겪고 있는 일부 정려유산이 보여 지는 것은 사실이나 이 마저도 역시 향후 남원 정려유산의 시급한 재정비를 필요로 하고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남원 정려유산이 아직까지는 지역사회에서 중요한 향토 자산적 성격으로 후대에 길이 전해주어야 할 鄕土遺産(향토유산)으로 인식되고 있기에 그 문화 유산적 가치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2. 조선시대 정려제도의 특징
조선시대의 정려 정책의 도입은 민심을 얻는 중요한 국책사업이었다. 특히 조선의 사농공상의 身分秩序(신분질서)가 엄격한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숭유억불책(崇儒抑佛策의 결과로 인해 주자학이 도래와 적극적인 대중화 과정을 거치면서 좀더 세부적으로 백성들에게 浸透(침투)할 수 있는 정책을 개발, 논의되는 과정에서 결정되어 최종 심의를 거쳐 전국적으로 국책사업으로 시행된 일정의 행정제도와도 같았다.
조선의 건국이념과 朱子學(주자학)의 도입은 미풍양속상의 충효사상에 대한 권장과 미풍양속을 장려하기 위해 孝子(효자), 孝婦(효부), 忠臣(충신), 烈女(열녀) 등이 살던 동네에 붉은 칠을 한 정문을 세워 표창하는 제도로 자연스레 연결되었다. 그 정려제도가 시행되면서 전국의 마을 어귀에는 정려대상자들이 추천 선정되어 정려문, 정려비, 정려각 등이 제각각 세워지게 되면서 더욱 活性化(활성화) 되었다. 그러나 본래 조선시대의 정려 정책은 그 出沒(출몰)과 정책적 도입 면에서 그 최초 시기를 삼국시대 신라로부터 기원을 잡고 있기도 하였다. 실제가 그랬기 때문이다.
정려정책이라는 구체적인 과정은 이후 고려를 거쳐 조선에 와서는 전국적으로 그 의미와 충효사상의 사회적 가치를 중요시하는 분위기에서 조선시대에 와서는 급격하게 그 질적, 양적 수준이 높아져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정려에 대한 구체적인 문헌 사례 역시 <삼국사기> 권 48 열전 제8의 효녀 지은에 대한 신라국의 이야기와 <삼국유사> 권5 효선 제9 빈녀 양모의 내용에서 정려정책의 필요성과 그 社會的 意味(사회적 의미)의 가치를 잘 드러나고 있다
즉, 신라의 효녀 지은에 대한 표창으로 신라의 진성여왕이 조 500석과 집 한 채를 내리면서 복호(신분의 역을 면제하는 것)를 해주었고 또 그 마을을 정표하여 효양방이라고 했다는 기록에서 정려의 최초 등장을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고려시대의 경우에도 <고려사> 기사에서 고려 명종, 성종, 충선왕, 충숙왕, 공민왕등이 왕명을 내려 효자, 조부모를 잘 섬기는 손자, 아내가 죽은 뒤 새로 장가들지 않고 혼자 사는 의로운 남편, 수절하는 부인, 정조를 굳게 지키는 여자 등에 대해서 마을 입구에 정표하여 그 의미를 더욱 장려하였다고 전해지는 것에서 정려의 傳統性(전통성)과 시대적 전승과정을 볼 수 있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고려의 최고 충신인 정몽주(鄭夢周), 김광재(金光載), 조희참(曺希參) 등이 효자로 정려되었으며 그 밖에도 열려로서 권금(權金)의 처와 이동교(李東郊)의 처 배씨, 정만(鄭滿)의 처 최씨 등이 국가적인 정려의 사례로서 표창을 받았다.
조선왕조의 출현이후에는 초기부터 주자학을 바탕으로 한 정려진흥책의 국가정책이 세워져 조선조 말까지 굳건하게 지켜져 갔다.
세부적으로는 삼강오륜과 鄕約精神(향약정신)을 바탕으로 한 유교적 풍속 교화를 위해서도 그랬겠지만 효·충·열의 행적이 있는 자에게 사회적 신분의 고하, 귀천, 남녀를 막론하고 국가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정표하였다는데서 조선사회적 社會現象(사회현상)으로 그 가치가 보편화 되었다. 조선왕조의 정려정책은 조선건국의 1392년(태조 1) 7월부터 19세기 말까지 그 방침이 지속적으로 유지, 전승되었다.
우선 조선 초기의 정려정책으로는 고려시대의 충신· 효자· 순손(順孫)· 의부(義夫)·절부(節婦) 등에 대한 정려정책이 그대로 계승하면서 더욱 강화되었고 조선시대의 역대 군주 역시 즉위하면 반드시 충신·효자·의부·절부에 대해 각 지방에서 보고를 하도록 하여 그 대상자는 선정하여 문려(門閭)를 세워 정표하였고 그 집에 대해서는 요역을 면제하게 하였으며, 또 일부 사람들은 그 행적에 따라 상직(賞職) 또는 상물(賞物)을 주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사대부, 즉 사족(士族)의 경우에는 정려를 받는 행위자체가 가문의 명예로 크게 여겨졌으며 공사천(公私賤)의 경우는 신분을 면천하여 신분 상승을 가능하게 하게 되는 등 실제 일상생활에도 상당한 이익 될 수 있는 최고의 기회로 여겨져 충효사상의 실천에 큰 기반이 되었다. 따라서 대를 이어야 할 숙명이 있는 가문이라면 당연히 후손들로 하여금 정려를 받을 수 있도록 상시적으로 그 효행을 본받도록 권장(勸獎)하였다.
실제로 조선시대에 군주로부터 정려를 받은 정표자들은 실제로 많은 지역사람들을 감동시키고 효행활동을 장려하는 본보기 효과를 거두었다.
지방행정적 측면에서도 지역교화(地域敎化)의 일선에서 큰 도움이 되는 일익을 담당함으로써 유교적 인간상을 정립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특히, 임진왜란·병자호란 등의 전쟁 중에도 삼강(三綱)의 행실이 뛰어난 효자·충신·열녀의 수는 평시보다 몇 배나 더 많았다는 점에서 정려정책은 조선시대의 국가행정에 중요한 정책적 기능(機能)을 담보했다고 할 수 있었다. 국가에서는 정려대상자들을 선정함에 있어 지방행정과 지역 토호(土豪)을 동원하여 중앙집권적 이념과 충효사상에 대한 유학적 장려활동에 활용하였음은 물론 이들을 정려·정문·복호 등으로 명예와 실질적인 이익을 주는 포상을 진행함으로써 민심을 격려하고자 하였다.
그
러나 일부 어떤 면에서는 가문의 지속성과 개인적 욕심으로 인해 정려의 수상을 의도적으로 취득할 목적으로 활동하는 하는 자도 있어 1800년대 이후의 조선시대 후기에는 정표자의 진위문제가 매관매직하는 당시의 보편적인 현상이 일어난 根據(근거)를 들면서 정려의 문제는 문중 간, 지역 간 계층 간을 넘어 지역적인 논란의 시비가 자주 거론된 경우도 많았다. 따라서 현재 한국의 문화재 정책에서도 1800년대 이후의 정려비, 정려문, 정려각에 대해서는 이런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그 가치적 판단(判斷)의 잣대를 엄격하게 적용하면서 정려유산의 문화재 지정에 신중(愼重)을 기하고 있을 정도다.
3. 남원권역 정려의 鄕土文化史的 특수성
1) 조선조 국책이념의 정려문화 확산에 공헌
앞서 말한 대로 조선시대에는 전국적으로 儒學(유학)을 국시로 삼아 충효사상의 국가이념을 전국적으로 장려하는 국책사업이 진행되었다. 따라서 유학진흥에 의거하여 유학의 근본인 충효사상에 대한 이데올로기의 전국적 확산의 지방행정의 근본을 삼고자 주자학의 도입과 정책적판단과 실제 백성생활의 실천 운동적 관점에서 三綱五倫(삼강오륜)은 국가의 존립기반으로 사농공상의 계층에 깊게 침투하였다.
이후 조선시기 전반에 걸쳐 국가의 기반은 구체적인 충효사상의 행적을 근간으로 장려표창 제도를 일반 제도화시켜 국가 존립을 유지하고자 하였으며 정책적으로는 충•효•열•례를 장려하고 거기에 두드러진 행적을 가지고 있는 백성들에게는 삼강행실도에 올려 여타의 다른 백성들의 사표로 삼는 정려정책이 보편화되었다. 조선시대의 특수한 사농공상의 신분제도에 얽매인 백성들은 당연히 국가의 정려자로 선정될 경우 면천이나 재산증식의 기회가 생기므로 당시에는 정려를 받는 것을 신분상승의 기회로 여기고 이를 가문의 영예로 여겼다.
남원의 정려는 현재 남원 행정구역 23개 읍면동(1읍15면7동)지역에 총 200 여기의 정려유산이 분포하고 있다. 이렇듯 전국에서도 唯一無二(유일무이)한 정려유산이 많이 존재하였다는 정려유산의 현황은 국가정책에 있어 조선시대의 전라도 4대 중심도시인 전주, 남원, 광주, 나주의 선비문화권역에서 행정 중심적 정려진흥정책의 성공적 정착과 문중 중심의 정려가 대중화 되어 보편적인 사회현상으로 국가정책 확산에 크게 이바지하였다고 볼 수 있다.
2) 남원 문중의 가문확대 및 신분면천의 기반으로서 지속 활용
조선조 국가 정려진흥정책은 조선후기로 진행될수록 정려를 내려 달라는 고을 수령의 중앙부처 송달의 추천장이 많아지면서 그 절차가 상당히 복잡할 정도로 세분화되었다. 따라서 정려대상자로 지정 받아 왕명이나 國家表彰(국가표창)으로 하사 받기위해서는 우선 해당 고을의 향교에서 초안을 잡아서 그 고을의 유림이 서명하고 지방행정관(목사, 부사, 현감)의 통문으로 국가정책을 立案(입안)하는 6조의 예조부처에 올려지게 과정을 거쳐, 예조의 심의를 거쳐 최종적으로 직접 國王(국왕)에게 주달하여 정려하사여부가 결정되어 정려가 하사되게 된다.
그러므로 정려대상자는 주로 까다로운 節次(절차)를 거쳐야만 하는 일반서민층 보다는 문중이나 사대부집안 등 양반가문과 문중이 대다수를 차지하였다.
이는 문중의 세력을 과시하고 재력과 지방행정과의 癒着(유착)을 고착화 시키는 폐단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즉 지역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토호 문중이나 士大夫(사대부)가문의 당대 지식인층의 지역기반안정화에도 어느 정도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3) 정려대상자의 구역별 고른 분포의 정려문화 창출과 계승
남원 관내의 약 200 기의 정려문화유산은 호남제일의 유산을 남원시가 보유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조선조의 전주, 남원, 광주, 나주의 호남지역 선비문화권 4대 중심도시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事例(사례)가 아닐 수 없다. 즉 조선조 지방행정의 중심지답게 문중 가문과 지역 지식인층 모두가 백성으로서의 도리 -“국가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는 인간상의 구현”- 를 충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정려문화를 다수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남원지역 정려대상자뿐만 아니라 지역의 역사, 民俗構造(민속구조)의 정체성이 바람직한 계승구조를 가지고 근대까지 傳乘(전승)되고 계승되었음을 파악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현재 남원관내 정려유산은 행정구역별 고른 分布圖(분포도)를 보이고 있다. 이는 조선시대 지역의 중추 교육기관이었던 남원향교와 운봉향교의 두 교육기관을 중심으로 48방내의 서당과 서원이 다수 분포하며 생산해 낸 충,효,열,예의 고장으로 남원지역 주민들의 국가인재에 대한 충, 예사상과 가정과 지역향토에 대한 효, 열사상이 조선시대 남원부 권역 내에 깊게 뿌리내고 있었음을 반증하는 결과다.
세부적인 정려의 分析(분석)으로는 이번에 조사된 142점의 정려유신 지표 중 정려유산의 세부 현황이 효자정려(43기)효열정려(83)기타정려(16기)로 분포됨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조선조 남원도호부에 수백기의 정려유산이 남아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남원의 정려문화는 국가 정책적 정려의 진흥과제 확산에 남원출신 정려 대상자들이 정책적 부합 면에서 그 役割(역할)을 충실히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 남원 정려유산의 분포와 정리 (정려지표 142점 대상)
(자료 정리 중)
5. 끝 말
남원의 정려유산은 대대로 형제간에 우애하는 효자집안이거나 자신을 굶어도 평생을 돌보았던 殺身成仁(살신성인)의 자세에서 지역민들의 尊敬(존경)을 받았던 인물들이 주로 그 생전활동에 대한 칭송의 당연한 결과물이 바로 대부분의 정려유산들이다. 그 가치야 두말할 나위가 없을 정도로 生命(생명)을 귀히 여기고 평생을 홀로 지내며 시부모를 병과 봉양하는 현대인들의 사표가 되는 사례도 너무나 많다.
그 뿐이 아니다. 嚴冬雪寒(엄동설한) 먹 거리가 없던 시절에도 자신의 육신을 자르고 피를 뽑아 음식대용으로 지극정성으로 먹게 하였다거나 죽은 시부모나 남편, 또는 일가친척의 가족의 묘에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날마다 수년씩 찾아 명복을 빌었다는 실제 이야기는 현대인들로서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고귀한 이야기들이다. 정려의 가치는 미래까지 영원히 불타야 할 韓國文化(한국문화)의 진수다.
따라서 어제도 오늘도 미래도 현재진행형으로 널리 그 유산을 전승해야 할 것이다. 시대를 넘고 아무리 과학이 발전한들 결국에는 사람 사는 사회의 의식주생활과 지역사회의 人間關係(인간관계)는 없어질 수 없는 현실에서 남원의 정려는 중요하다. 물론 많은 부분 국가에서 하사한 정려문도 많았으나 지역적인 부분에서 문중이나 지역민들이 자발적으로 해준 정려가 더 많았다.
이는 전통적인 사회에서 문중이나 行政權域(행정권역) 안의 고을 수령의 역할이 더 컸다는 의미와도 相通(상통)되는 부분이다. 남원의 정려유산을 통해 단순한 효자, 효부, 열려, 충신을 드높히는 것 보다는 올바른 인간, 배우지 않았어도 사회 속에서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지식기반의 정보화 사회인 현대사회에서 오히려 지식인의 識者層(식자층)이 더 범죄를 저지르고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를 파탄내고 부모형제와 싸우는 등의 패륜아 경향이 많아지고 있다는 현상은 우리의 눈과 귀를 의심할 정도로 충격적인 사회적 현상으로 점점 많이 발생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현 시점에서 선조들의 정려 문화유산을 다시금 배우면서 진정 어떻게 살 것인가? 를 苦悶(고민)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우리의 지역사회와 한국 사회는 뛰어난 역사적 문화적 찬란함을 지니고 있다.
끝으로 왕조문화의 王權時代(왕권시대)에 가려 억압받고 통제받았던 과거의 사회가 우리의 그간 역사문화라면 이젠 전 시대를 통틀어 存在(존재)하였던 서민대중문화의 정려유산의 가치를 현대에서 더욱 드높이는 한국사회를 기대해 보며 남원 정려유산을 통한 남원 향토문화 진흥을 念願(염원)해본다. 더불어 남원의 정려유산을 문화체험이나 文化商品(문화상품)으로 만드는 것도 시급한 課題(과제)로 추진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