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여우, 눈물이 빗물처럼
▲ 지은이 : 이상국 출판사 : 대원사 가격 : 1만2000원
2009년 봄날, 조선의 사랑이 운다
한 여자가 있었다. 첩의 딸로 태어나 첫 번째 결혼에 실패하고 우연히 운명의 남자를 만났다. 그를 너무 사랑해 소실로 들어가서라도 함께 살고 싶었다. 남자는 말했다. “나와 살고 싶거든 시를 쓰지 마라.” 영혼을 판 파우스트처럼, 사랑의 조건으로 시를 팔아 넘긴 이 여인은 조선시대의 이옥봉이다. 하지만 운명은 그녀에게 시를 쓰게 했고, 여인은 결국 한강변으로 쫓겨나 임진왜란 속에서 자신이 쓴 시들을 휘감고 강물 속으로 뛰어든다. 400여 년 뒤 사람들은 그녀를 잊었지만, 목숨 건 사랑을 피처럼 뱉은 시는 남았다. ‘빈섬’ 이상국이 지은 역사 팩션 ‘누여우(淚如雨), 눈물이 빗물처럼’(대원사)은 조선의 연가(戀歌) 속에 들어 있는 절절한 사랑의 비밀들을 파헤치고 있다.
시는 마음의 거울이라, 삶이 품고 있는 진실을 드러낸다. 황진이는 눈먼 어머니를 버린 아버지에 대한 증오를 가슴에 깊은 콤플렉스로 가지고 있었다. 남자에게 절대로 자신의 운명을 맡기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다. 남자를 경멸하는 이 아름다운 기생이 걸어간 길은 자유롭고도 쓸쓸하다. 화담 서경덕을 만나 진짜 남자가 무엇인지 알게 된 뒤에 그녀는 세상의 이름과 허영을 훌훌 벗고 금강산에서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조선 오디세이’에 오른다.
작가는 조선의 사랑을 일곱 빛깔로 나눴다. 이옥봉과 황진이 외에도 홍낭, 매창, 김삼의당, 김부용, 임제가 보인다. △살아서 사천리, 죽어서 이천리 사랑을 향해 뛰어다닌 홍낭 △살아서는 유희경을 기다리고, 죽어서는 허균을 기다렸던 거문고 여인 매창 △과거 시험 낙방생인 남편을 향해 열정을 퍼부은 김삼의당 △한강변 문학살롱의 핵심 멤버였던 기생 김부용의 영화 같은 인생과 허기진 내면 △조선의 카사노바라 할 만한 백호 임제의 멋진 연애와 쓸쓸한 방황이 다채로운 빛깔로 아로새겨져 있다.
노래도 노래거니와 가사가 말발굽을 세운다. “푸른 산속에 흐르는 계곡물아. 잘도 흘러간다고 졸졸거리지 마라. 푸른 바다에 한번 도착한 뒤에 다시 돌아오려면 기회가 없다. 밝은 달이 빈 산에 꽉 차 있으니 놀다 좀 가시오.” 벽계수와 명월을 맞춘 천의무봉의 은유다. “어이 벽계수씨, 쉬었다 가세요.” ‘취한 오빠’의 팔을 잡는 무뚝뚝한 호객도 언어 몇 개가 초간장을 치면 사람의 간장을 녹이는 절절한 유혹이 된다는 걸 황진이는 유감없이 보여 준다. 우리야 이 시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서 감동이 줄었지만, 당시 벽계수는 처음 듣는지라 영혼의 뒤통수를 치는 사이렌의 노래 같았던 모양이다. 그는 손곡의 말을 잊고 무심코 뒤를 돌아본다. 그러자 나귀가 취적교를 다 간 난간에서 비틀거린다. 벽계수는 균형을 잃고 말에서 떨어진다. 한껏 무심한 표정으로 일궜던 카리스마를 바닥에 처박고 만다. 황진이는 껄껄 웃으며 팔짱을 끼고는 돌아선다. 한소리 툭 뱉지 않았을까. “그대는 명월에 계수나무 심을 생각 마시고, 그냥 쭉 흘러가는 게 좋겠소.” <‘자존심 강한 사랑, 황진이’ 중에서>
작가 빈섬은 <옛 공부의 즐거움> <추사에 미치다> 등 역사 관련서를 냈고 자신의 연애시를 모아 <러브레터 읽어 주는 남자>를 쓰기도 했다. 이번 책은 역사적 센스와 사랑의 감수성이 합쳐진 셈이다. 단순히 흥미만 겨냥하는 기생 스토리가 아니라, 당시의 삶을 치밀하게 복원하는 상상력과 시의 감칠맛이 어우러지는 향기로운 책이다. 말미에는 2009년 서울 인사동에서 책에 출연한 조선의 여인과 남자들을 불러 ‘번개모임’을 갖기도 한다. 시간을 뛰어넘어 만난 미남미녀들이 감회를 나누느라 시끌시끌하다. ‘눈물이 빗물처럼’ 흐르는 옛 사랑의 희비에 흠뻑 젖어보고 싶은 날, 조선의 남녀들이 여기 도착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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