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갑려 韓춤(민살풀이) 名人의 삶과 예술
--- 우리 춤만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정서와 자연발생적인 기를 발산하는 춤을 조갑려 명인은 보여주고 있다.
우리 민족의 어둡고도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시절인 1931년 6월 20일. 전라도 남원 땅에는 남원권번선생 이백삼의 지도하에 남원권번의 예기들이 조선 숙종 조 이후부터 전승되어 온 남원의 춘향문화와 춘향정신을 기리고자 대중적인 춘향제사가 열렸다. 그 춘향제사는 한국 최초로 시행된 축제문화의 시작을 알리는 작은 몸짓이기도 하였다.
그 춘향제사는 이후 제1회 남원춘향제로서 공식적으로 인정되기 시작하며 남원권번과 기생조합이 주축이 되어 매년 추진된 춘향 제사를 보기 위해서 매년 4월 초파일에는 전국각지에서 구름같이 사람들이 춘향이들과 춘향영정(남원권번의 김명애 기생을 모델로 그린 이당 김은호 선생의 작품)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조갑려 명인은 그렇게 한국의 전통 예인계에 자신의 등장을 알렸다. 조 명인은 제1회 춘향제 당시 남원권번에서 예기 수업을 받던 9세의 예기로서 광한루원 누정 앞에서 화무를 추었고 그 행사로 인해 이후 1941년 제11회 춘향제까지 화무, 승무, 민살풀이를 계속해서 대중적으로 보급 시켰다. 그러기를 1942년 전라도의 재벌가인 당대 최고였던 한성물산의 정씨가문으로 시집(남편 고 정종식 옹)갈 때 까지 지역 최고의 예인으로 활동하였다.
이 시대 마지막 남원권번 예인의 살아있는 전설인 조갑려 명인(89세)의 삶은 춤 그 자체였다. 조갑려 명인은 구한말 조선제국의 마지막 궁중 춤 교수였던 곡성 옥과 출신의 이장선 선생의 제자로 길러진 남원권번의 살아있는 전설이요 조선제국의 전통 춤인 민살풀이 분야에서도 국내에서 최고의 명인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전통 춤의 명인이었다.
“ 이장선 할아버지는 승무만 가르쳤죠. 승무를 추어야 모든 춤을 출 수 있는 거라! 하시며. 일단 북 가락만 가르쳐 주면 화무나 살풀이, 무속 춤 등 나머지 춤은 내가 알아서 자연스럽게 추었어요. 나중에는 장단가락이 몇 마디 없어도 내가 만들어서 내 멋으로 낼 수 있었습니다. 승무를 배울 때 장심자락을 어깨에 걸치고 손맥을 발 맥에 연결시키라고 이장선 할아버지는 누가 말했지요. 처음3~4년간은 허리위도 손도 못 올리고 발 춤만 추게 하셨는데 치마를 둘러 뒷짐 지고 발걸음부터 배운 셈입니다. 호흡이라는 말도 쓰면 안 되었구요. 발을 디디면 배에 힘이 주게 되는 데 춤은 그렇게 발을 무겁게 옮겨야 춤이 무겁고 깊이 있게 되죠 ! ”
조갑녀 명인의 춤은 아무나 흉내를 내서 출 수 있는 춤이 아니고 민살풀이(소도구가 없이 맨손으로만 추어야 하는 가장 고난이도의 전통무용)춤으로서 지극히 정중하고 법도가 분명하면서 무던하리만치 화려한 기교가 없지만 무거우면서도 격조 있는 춤으로 호흡이나 발 놓임새가 너무도 정확하여 춤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한번 공연을 본 사람들 모두가 모두 감탄할 정도였다고 한다. 국악의 대표적인 남원의 판소리로 비교하자면 동편제 소리로서 통성에 계면조와 우조를 모두 담은 그릇처럼 음양교합이 분명하여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춤이므로 한국 전통춤의 유산으로 평하기에 전혀 손색이 없다.
---- 9세부터 화무, 승무, 민살풀이, 판소리, 시서화를 섭렵하며 19세까지 명인의 길을 가다.....
조갑녀 명인은 1923년 음력 1월 22일에 남원시 금동에서 부친 조기환과 모친 방성녀의 다섯자매 중 맏딸로 태어났다. 부친은 남원권번의 선생으로 유명한 분이셨다. 조 명인의 고모인 조기화도 남원권번의 제일가는 예기이셨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조 명인은 예인 집안에서 북, 판소리, 춤, 가야금, 시서화를 할 수 있는 배경을 가졌다.
이후 1928년 부터는 조선의 5대 권번에 속하는 남원권번(총 3채의 가옥으로 구성)에서 비싼 학사금을 치르며 등하교를 하면서 제대로 된 권번 예기의 배움을 시작하였고 전남 곡성군 옥과면 율사리 이장선(李長善 1866~1939년)선생의 승무 전수 지도로 본격적인 민살풀이를 익혔다. 조 명인의 부친은 남원권번의 선생으로 이장산 옹과 많은 왕래를 하였기에 조 명인은 일종의 특혜를 입은 것과 같았다. 이 장선 옹은 조선이 한일합방(1910년 8월)으로 일제와 병합되면서 서울에서만 활동하며 임금님 앞에서만 춤과 취악으로 임금을 웃고 울리던 분으로 종9품 참봉 벼슬을 하고 망건에 옥관자를 달고 다닌 분으로 유명했던 이 시대의 궁중 춤의 마지막 명인이었다.
이장선 옹은 한일합방이 되자 고향인 곡성 옥과로 귀향을 하면서 거주하면서 인근에 있던 남원권번선생인 조 명인의 부친을 찾아 가는 세월을 소회하며 보냈는데 어느 날 남원권번에 왔다가 춤 솜씨를 흉내 내던 어린 조갑려 명인의 인상과 자태를 보고 예사롭지 않게 보면서 자신의 제자로 조갑려 명인을 거둔데서 조 명인의 인생은 춤꾼으로 발탁되는 기회가 생겼다.
물론 다른 제자도 함께 있었다. 전북 순창군 금과면 태생의 장수향 (張秀香 1889~1943년)과 곡성 옥과 출신 한진옥(韓振玉 1910~1991년), 서울에서 활동한 김정연 (金正淵 1913~1987년)과 그리고 남원에 조갑녀 (1922년 처음 만남)명인까지 네 명이었다. 그러나 다른 제자들은 모두 작고하시고 현재에는 오직 조갑녀 명인만이 그 명맥을 잇고 있어 그 명맥의 중요성이 다시금 문화유산적인 차원에서 다시금 부각되고 있다.
이장선 옹의 지도 덕분으로 1931년 9세의 나이였던 조 명인는 전통무로서 화무, 승무, 민살풀이를 섭렵하며 두각을 드러내게 되는 데, 1931년에 시작된 한국 최초의 축제인 제1회 춘향제부터 1941년의 제11회 춘향제까지 부도덕한 사회를 항거하는 조선기생의 삶을 당차게 내세우며 온 몸으로 겪고 조선의 예술을 지키고 사랑한 여류명인이자 남원권번 예기로서의 조선 韓(한)춤의 예술성 재현과 문예적 가치를 드높이는 활동으로 당대 최고의 명무로 인정받았다. 현재 유일 무일한 남원권번의 마지막 예인이기도 하다.
남원권번은 그 시대를 풍미하였으나 현재 연구자에 의해 제대로 연구된 바가 없다. 일제강점기에서도 45명이나 숨진 남원의 삼일운동(1919.4.4)에도 적극 가담하였고 또 서슬퍼런 시절에 독립투사에게 후원금을 내면서도 일본헌병태의 예기부름에는 일절 응하지 않는 등 강렬한 항일의식을 지닌 당대의 여류 지식인이었다. 그래서인지 전국의 4대권번(한성, 진주, 평양, 동래권번이 번창할 때에서 남원권번은 크게 성장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조명인은 그렇게 일제 식민지 통치하에 우리 민족은 나라를 빼앗긴 슬픔에 한으로 설움으로 방황하던 시절 춤과 판소리, 시서화, 사서삼경을 공부하면서 힘들게 가슴에 품어 안고 살아왔다. 그러나 지역문화의 대표적인 마당인 타 도시로 갈 수 없을 정도로 춘향제와 남원 권번 예기들의 수십 차례의 지역민 위안공연만 하더라도 전국적으로 수십만 인파가 몰릴 정도로 인기가 높았고 잘 나가던 명인 조갑녀의 춤 인생도 이후 많은 시련과 춤 인생의 단절은 남원지역 주민들에게 큰 아쉬움의 족적을 남겼다.
---- 부친의 작고와 당대 최고 재벌가와의 혼인 , 그리고 자녀양육 위한 헌신과 수십년의 예인생활 중단......
조 명인이 20세가 되던 해 부친이 작고하셨다. 평생 의지했던 기둥이자 목표였던 아버지의 죽임으로 조 명인은 큰 충격에 빠졌다. 그리고 바로 이듬해 (주)한성물산의 재벌가 며느리로서 화려하게 남편인 정종식 옹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되면서 뜻하지 않게 예기이자 여류명인의 전부였던 춤 인생은 단절되었다. 화려했던 예인으로서의 삶을 한 순간에 포기해 버린 결단이었다. 그 뒤 평범하게 12남매의 어머니로서 30년간을 예기와 전통춤의 세계를 떠나 자녀교육에만 전념했다.
조 명인은 그렇게 자신을 철저하게 자기조절을 하며 딸들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크게 키울 때 까지도 행여나 자신의 권번 예기인생과 춤꾼이었다는 사실이 노출되는 것을 극구 꺼렸다. 오히려 아들딸에게 피해가 갈 수 있는 상황이 생기지나 않을 까를 염려하며 수십년을 칩거하며 모진 인내의 세월을 감내하며 자신을 숨기며 살았다.
그러나 하늘이 준 재능은 그리 쉽게 없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 사람 모두는 자신의 화려했단 과거신분을 숨기고 사는 것이 여간 힘든 삶이 아닐 것이다. 조갑려 명인 역시 자신의 인생을 감추고 살아가겠다는 각오로 남편의 뜻에 따라 철두철미하게 자신의 춤꾼인생을 마음 속에서만 삭히면서 예기로서의 삶을 30년간이나 숨기며 살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 명인은 결코 민살풀이와 승무, 화무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조 명인이 다시금 춤을 추게 된 경위는 1971년 남원 광한루원에 수중누각인 완월정의 낙성식에서 지역유지 분들의 옛 민살풀이 춤에 대한 추억으로 여러 경로를 통해 조 명인의 춤을 무대에 올려야한다며 하도 간곡한 부탁을 해서 잠시 외도아닌 외도를 하면서 민살풀이를 다시금 추게 되었고 이후 10년 단위로 한 두 번 더 무대에 섰다. 역시 피는 못속인다고 했던지 조 명인의 두 딸이 그 뒤 어머니 모르게 춤을 배우다 어머니의 과거를 우연하게 할고 대학에서 전통무용을 전공하게 되면서 조 명인은 다시금 과거의 민살풀이를 대중화 시키려는 욕구를 가지게 되었다.
1976년에는 다시금 춘향제에 54세의 나이로 재 데뷔를 하게 되면서 민살풀이를 다시금 추게 되었다. 물론 자식 중에는 격하게 반대하는 자식도 있었지만 1982년 [한국의 명무]라는 조 명인의 삶의 행적이 담긴 화보집이 한국일보 정범태 기자의 노력으로 출간되고 외부에는 알리지 않은 채 1997년 부터는 큰딸 정명희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전수하면서 모녀지간에 12년간의 전수활동을 조금씩 했다고 한다.
---- 조갑려 민살풀이라는 진정한 우리 춤을 한류브랜드로 성장시켜 세계 시장에 도전하는 전통韓(한)춤으로 재현하고 복원해서 이 시대의 새로운 창조적 가치와 기운을 만들어야......
2004년 6월 살고 있는 남원에서 새벽 운동길에 큰 교통사고를 당해 임종까지 준비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 빠진 적이 있었던 조갑려 명인은 이후 자신의 예기인생 복원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민살풀이의 전승을 다시금 결심하였다. 이후 교육용 한춤 비디오 제작과 2007년 한국 예술의 전당 어머니 춤 공연 및 2008년 하이 서울 페스티벌 초청의 창덕궁 숙명전 무대공연으로 조갑녀의 민 살풀이춤은 관객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것을 재개하였다.
현대의 전통무와 한춤들이 대부분 비슷비슷한 공연의 양산으로 무용관객과의 소통이 줄어들고 있는 세태에서 과거의 명무 조갑녀 춤을 본 많은 전문가들은 세월의 무상함에도 그 옛적 전통무의 고고함이 재현되는 모습에서 감동의 눈물까지 흘릴 정도 그렇게 조갑려 명인은 우리에게 다시금 돌아왔다.
최근 조갑려 명인에게는 모처럼 웃고 즐길 수 있는 일들이 찾아오고 있다. 문화재청 중요무형문화재 최종심의에도 지자체와 도청을 거쳐 문화재청까지 올려라 문화재지정 심의를 앞두고 있으며 2009년 문화체육관광부의 [전통문화재현공모사업]에도 선정되어 활발하게 자신의 삶과 생애사를 배우고 기록하려는 여러 기관, 단체들의 사업이 예정되어 있으며 과거 여류명인이었던 예기와 남원권번의 족적을 찾는 서적 출간도 마찬가지로 준비되고 있다.
1982년 한국일보(구희서 기자)의 명무연재(조갑녀의 살풀이춤)와 2006년 한국춤 백년(한국춤의 전통을 이어온 20세기 예인들, 이규상, 눈빛출판사)의 단편적 기록에서 만날 수 있었던 조갑려 명인의 삶과 예기로서의 한춤은 조금씩 대중화되어 있으며 한편으론 시급히 문화유산화 되어야 할 과제도 안고 있다. 조갑려 명인의 남은 생애를 비교해 볼 때, 반 비례적적인 다각도의 역사기록, 남원권번의 연구, 예기의 생애사, 기생의 학습형태 등 그 가치가 무궁무진하다. 일본의 게이샤와 대비되는 한국의 예기들이 다시금 살아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가장 중요한 한춤으로서의 대중과의 소통 및 조갑려 류의 민살풀이 제자(약 40여명) 양성은 더더욱 급하다. 이 시대가 해야 할 몫이 너무도 크다. 오는 7월 7일 남원 국립민속국악원과 10월 15일 전주 소리문화의 전당에서는 조갑려 명인이 제자들과 함께 직접 자신의 한춤 세계를 제대로 된 무대에서 보여줄 작정이라고 한다.
머릿속에서 한 시도 내려놓지 않았던 장단과 한춤, 손바닥을 꺽은 채 애가 터지게 인생의 희노애락을 표현하는 민살풀이를 보며 일제에 항거한 남원권번과 남원예기의 혼을 느껴짐은 어쩔 수 없었다.
------ 조갑려 민살풀이 명인이 살아 온 이력
* 1923년 1월 22일 남원시 금동 출생 (5자매 중 맏딸)
* 1928년 남원권번에서 권번선생이 부친 조기환 옹에게 허락맡고 권번예기인생 시작
* 1931년 제 1 회 춘향제에서 춘향 제사와 화무, 승무 공연 시작
* 1932년 ~ 1941년까지 춘향제에서 매년 <승무, 살풀이> (공연 9세에서 19세까지)
* 1942년 ~ 1971년까지 공연절연
(부친작고, 결혼, 그리고 12남매의 육아활동의 예인은퇴 및 공적노출 자제)
* 1976년 남원 춘향제 행사 <살풀이 공연> 54세
* 1982년 전통예술명인사진집 [한국의 명무]에 조갑녀 살풀이 춤 글, 사진 수록 발간
저자: 한국일보사 구히서 님 및 정범태 기자 공동 발간
* 1982년 11월 20일(토)자 일간 스포츠지에 명무 연재 ‘조갑녀 살풀이 춤’ 게재
* 2004년~현재 다양한 제자그룹이 전수 및 공연활동 중
정명희,정경희, 강윤나, 이계영, 이재현, 김수자, 윤영숙,
정선주, 김경희, 이미수, 김영숙, 이성희, 김추자, 배순임,
황건자, 최분순 등이 조갑려의 승무 민살풀이 춤 전수 중
* 2006년 6월 2일 및 2007년 6월2일 국립 민속박물관 무대의
조갑녀류 민살풀이 춤 공연 : 정명희 춤판으로 민 살풀이춤 발표.
* 2007년 10월18일 제10회 서울세계무용축제 중 <어머니의 춤>공연 85세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
* 2008년 5월 6일 하이서울 페스티발 천년만세 초청공연 <창덕궁 숙정문 공연>
[위대한 시간 앞에 서다] 프로그램 중 명인 조갑녀 민살풀이 춤 공연
* 2009년 7월, 10월 문화체육관광부 [전통문화재현사업]의 학술, 공연, 서적출간 예정
문화재청에 중요무형문화재 심의 등재 및 심의과정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