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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도 남편의 육아휴직이 있었다

글쓴이 : 관리자 날짜 : 2007-07-18 (수) 22:40 조회 : 1429
조선시대에도 남편의 육아휴직이 있었다
[푸른깨비의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⑪] 조선시대의 특별한 임신과 육아
    최형국(bluekb) 기자   
 
 
 
 
▲ 조선시대 풍속화 중 아낙이 아이에게 젖먹이는 장면입니다. 들에 나가 일하다가 잠시 시간을 내어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있습니다. 누가 뭐래도 울엄마표 모유가 최고입니다. 김홍도의 풍속화첩 중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결혼을 한 후 우리네 삶에서 가장 축복된 일은 아마도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일 것입니다. 물론 열 달 동안 엄마의 뱃속에서 쪼그리고 있다가 넓은 세상에 나오는 아이에게도 그 순간은 축복이 되겠지요.

특히 우리나라 20~40대 결혼 가정의 약 10~15%가 불임인구로 보고되고 있을 정도로 많은데,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 끝에 얻는 아이의 탄생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의 시작일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조선시대 임신과 출산의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지금도 아이를 갖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는데, 조선시대에도 과연 그랬을까요?

태중의 아이 성을 바꾼다?

조선시대에는 남아선호사상 때문에 임신을 하면 '오직, 아들!'이라는 강박관념이 엄마는 물론이 가족구성원 전체에 폭풍처럼 몰아쳤습니다. 그래서 만약 태아가 여자아이라고 판단되면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서 남자아이로 바꾸는 묘책이 실행되곤 했습니다. 심지어 온 국민이 모두 알 만한 <동의보감>에도 여태를 남태로 바꾸는 방법이 기록되기도 했습니다. 그 기록을 보면,

"임신한 지 3개월이 지나면 태아를 시태(始胎)라고 하는데, 이때는 혈맥이 아직 흐르지 않아 모양이 만들어지고 변하게 된다. 이때에 남녀의 구분이 정해지지 않으니 약을 먹거나 방술을 사용하면 사내를 얻을 수 있다."

뭐, 지금 생각해 보면 어이없는 일일 수도 있지만 어차피 확률은 반반이니 만약 아들이 태어났다면 그 뜻이 하늘에 전해졌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이후 조선 후기에 부녀자를 위하여 빙허각 이씨가 엮은 일종의 여성생활백과인 <규합총서>에도 이런 부분을 설명해 놓았는데요. '활시위를 허리에 띠기를 백일을 하면 딸을 바꾸어 아들을 얻을 수 있다'거나 '지아비가 동쪽으로 향한 복숭아 가지로 도끼자루를 만들어 임산부에게 주는' 등 많은 묘술들이 전해지도 했습니다.

그런데 조선 중기 의학서인 <향약집성방>에는 '여아를 얻고자 한다면 귀걸이를 걸어라 혹은 여아를 필요로 하는 자는 자황(雌黃)을 차라'고 하여 거꾸로 남자아이를 여자아이로 바꾸는 방법이 기록되어 있어 여자아이를 얻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희소식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세종, 출산 전에도 미리 육아휴직을 주도록 하라!

 
 
▲ 이제 막 돌을 넘길 만한 아이가 엄마 젖을 달라고 보채고 있습니다. 시냇가에서 시원하게 머리를 감고 손질 중인 엄마는 귀찮을 듯도 싶은데 엷은 미소가 입에 걸렸습니다. 이제 곧 배부르게 젖을 먹을 수 있겠지요. 김홍도 풍속화첩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렇듯 태아의 성을 바꾸는 일은 여기저기서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도 먹고 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어야 하는데 그러한 기본적인 바탕이 안 되는 노비들의 경우는 출산과 양육이 엄청난 고통으로 다가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세종실록>을 살펴보면 이러한 노비들의 출산을 걱정하며 세종이 직접 형조에 명을 내리는 일을 볼 수 있습니다. 세종은 서울 밖 공공기관에 소속된 노비가 아이를 낳으면 휴가를 백일 동안 주게 하고, 이를 일정한 규정으로 삼게 하라고 하였고, 이후 4년 후에는 파격적으로 출산 전 휴가도 직접 챙겨주기에 이릅니다. 당시의 기사를 보면,

"옛적에 관가의 노비에 대하여 아이를 낳을 때에는 반드시 출산하고 나서 7일 이후에 복무하게 하였다. 이것은 아이를 버려두고 복무하면 어린 아이가 해롭게 될까봐 염려한 것이다. 일찍 100일 간의 휴가를 더 주게 하였다. 그러나 산기에 임박하여 복무하였다가 몸이 지치면 곧 미처 집에까지 가기 전에 아이를 낳는 경우가 있다. 만일 산기에 임하여 1개월간의 복무를 면제하여 주면 어떻겠는가. 가령 그가 속인다 할지라도 1개월까지야 넘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상정소(詳定所)에 명하여 이에 대한 법을 제정하게 하라." - <세종실록 50권, 12년 10월 병술>

이렇듯 노비에게도 출산휴가를 챙겨 줬던 세종은 500여년이 지난 오늘에도 찾아보기 힘들다는 남편의 육아휴가를 아낌없이 보내주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경외의 여종(婢子)이 아이를 배어 산삭(産朔)에 임한 자와 산후 100일 안에 있는 자는 사역을 시키지 말라 함은 일찍이 법으로 세웠으나, 그 남편에게는 전연 휴가를 주지 아니하고 그전대로 구실을 하게 하여 산모를 구호할 수 없게 되니, 한갓 부부가 서로 구원(救援)하는 뜻에 어긋날 뿐 아니라, 이 때문에 혹 목숨을 잃는 일까지 있어 진실로 가엾다 할 것이다. 이제부터는 사역인의 아내가 아이를 낳으면 그 남편도 만 30일 뒤에 구실을 하게 하라."

아마도 이러한 자애로움이 있었기에 세종은 조선 최고의 성군으로 불리며 오늘날까지도 최고액권 지폐인 만원에 부드러운 미소를 남기며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후 기록에는 이러한 특별 조치들이 보이지 않으니 그들의 처우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모릅니다. 다만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조선의 거의 모든 것이 황폐화되었기에 아마도 그들의 처지는 다시 나빠졌을지도 모릅니다.

단편적으로 변방에 사는 일반 백성들은 수도 없이 강제 노역에 끌려 다니다가 심지어 사내아이를 낳으면 젖을 주지 않고 버리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당시 먹일 것, 입힐 것 걱정에 아이가 성장해서 또 다시 그와 같은 생고생을 할 것 같아 가난한 부모가 내놓은 최선의 선택일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효종은 하교하기를,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자애로운 정은 어리석은 자나 지혜로운 자나 똑같은 것인데 사랑을 끊어서 버리고 돌아보지 않으니, 이 어찌 백성들의 본마음이겠는가. 이는 필시 절박한 근심이 몸에 다가와 보호할 수 없어서 이런 변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괴로움을 물어 마음을 다하여 강구하되, 백성들이 가장 견디기 어려운 일과 오랜 폐단으로 가장 백성의 피해가 되는 것과 악습을 없애고 보호할 수 있는 계책에 대해 일일이 보고하라." - <효종실록 20권, 9년 8월 갑신>

고 하여 백성들의 고통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가난 구제는 나라님도 못 한다'는 말처럼 날이 갈수록 백성들의 고통은 줄어들 줄 몰랐습니다. 지금도 복지국가라는 명분으로 수많은 국가들이 국민의 행복지수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것이 쉽지만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자식 잃은 슬픔을 가슴에 새긴 다산 정약용

 
 
▲ 다섯 가지 방위를 상징하는 오방처용무를 추고 있는 모습입니다. 처용은 신라 때부터 전염병을 가져오는 역신을 쫓는 상징으로 여겨졌으며 조선후기에도 이러한 춤은 계속되었습니다. 
 
ⓒ 호암미술관 소장
 
한편, 이렇게 곱게 키운 자식을 저 세상에 먼저 보내는 부모의 애끓는 심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을 것입니다. 아이의 울고 웃는 얼굴 하나를 바라보며 하루를 마감하는 부모들에게 자식의 죽음은 뼈에 사무치는 한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조선시대에 아이들이 넘기 힘든 병은 바로 호열자(虎列刺 : 콜레라)와 두창(痘瘡 : 천연두)이었습니다.

조선 후기 대표적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도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기며 한몸에 존경을 받은 사람이지만, 그의 자식복은 그리 후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죽은 자식을 생각하며 쓴 글에서 '모두 6남 3녀를 낳았는데, 산 애들이 2남 1녀이고 죽은 애들이 4남 2녀이니, 죽은 애들이 산 애들의 두 배이다. 아아, 내가 하늘에 죄를 지어 잔혹함이 이와 같으니, 어찌할 것인가'라고 하며 탄식의 글을 남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자신이 전라도 강진으로 귀향을 갔을 때 세 돌을 넘긴 자식이 천연두로 인해 세상을 떠났을 때 남긴 그의 글에는 피맺힌 부모의 한이 담겨 있습니다.

"나는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나은데 살아 있고, 너는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나은데 죽었으니, 이것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네 어미의 편지에, "애(農)가 '아버지가 돌아오시면 나의 홍역이 곧 낫고, 아버지가 돌아오시면 천연두가 곧 나을 것이다'고 했습니다" 하였는데, 이것은 네가 사정을 헤아리지 못해서 이런 말을 한 것이다. 그렇지만 너는 내가 돌아오는 것으로 마음의 의지를 삼으려 한 것인데 너의 소원을 이루지 못했으니, 정말 슬픈 일이다." - <다산시문집 제17권, 묘표>

정조가 이야기했던 수많은 개혁 과제들을 마치지 못하고 갑자기 서거한 후 급변하는 정국을 주시하다가 차라리 자식의 이름은 '농(農)'으로 지으며 농사를 지으며 살게 하려 했었던 그 아이를 정약용은 가슴에 묻어야만 했습니다. 이후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당시 아이들을 죽음에 몰아넣었던 괴질의 치료를 위해 중국에서 들여온 치시행온역방의 처방을 싣기도 하였습니다.

조선시대와 현재, 뭐가 달라졌을까?

이처럼 대를 이을 남자 아이를 얻기 위해 펼쳐졌던 수많은 일들은 근래에도 계속되었습니다. 단지 초음파를 이용해서 확실히 성별을 구분하고 그에 따라 남자아이가 아니면 오직 죽음만을 선사해서 초등학교 교실의 남녀 성비를 확실히 변화시키기도 했습니다.

더 나아가 저출산의 문제로 인해 국가 원동력의 핵심이 줄어드는 상황에 직면하였습니다. 여기에 아직까지도 남편의 육아휴직은 눈칫밥의 대상이어서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성역으로 되어 있기도 하지요.

물론 내년 1월부터 시작되는 아버지 양육지원 제도인 '파파쿼터(Papa Quota, 남성 육아휴직 의무화)제'가 있지만 그것을 아빠들이 다니는 기업들이 감당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 됩니다.

여성들의 육아 휴직도 곱지 않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회, 더 나아가 그것을 이유로 '해고'라는 마지막 카드까지 과감히 내비치는 기업문화 속에서 임신과 육아는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일 것입니다.

아무튼 자식에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지만, 그것을 감싸줄 사회는 여전히 답답해 보이기만 합니다. 조선시대 세종이 펼친 파격적인 정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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