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삼의 당 이갸기 >
-남원향토문화연구회 양경님
조선후기 문학사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업적을 남겼지만 지금까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시인.......
오히려 신사임당보다도 더 높은 문학적 업적을 남기고 있지만, 여성이기에 혹은 특별한 가문이 아니기에 문隙岵?평가를 받지 못함으로써 인정을 받지못한 여성시인, 우리고장은 만인의 총이나 김삼의당 처럼 그 업적이 낮게 평가되고 있음은 왜 일까.......
봄을 그냥 보내네..
김삼의당
밤마다 그대 그리워 잠 못 드니
누굴 위해 아침거울을 보겠어요
뜰에는 복사꽃 배꽃 만발하여도
또 이렇게 봄을 그냥 보낸답니다....
창밖에 젊은이가 지나가기에 日長窓外少年如
구름 같은 머리를 슬쩍 매만지고는 천천히 홀로 걸어보았다 乍整雲髮獨步徐
이 시를 쓴 김삼의당(金三宜堂)은 첫날밤 시로 남편을 감동시켜 산사에 공부하러 보낸 여자다. 열여덟 새색시가 열여섯살짜리 딸의 어머니가 되도록 남편과 생이별해 지냈지만 그립다고 호소하는 남편을 향해 포기하고 돌아오면 밤에 방에 들이지 않겠다며 등을 떠밀었던 여자다. 그래도 피가 달아오르는 걸 어쩌겠는가. 삼의당도 그땐 이십대 젊은 여자였다. 그는 솔직하게 관능을 노래한다. 그랬을지언정 그는 서정주의 시에서처럼 창 바깥으로 나가 젊은이를 부르지는 못한다. 시골양반이라 해도 양반은 양반이었으니, 그의 선택은 현실적이다
김삼의당은 조선 후기 남원과 진안 지방에서 농촌의 여성으로 태어나 어렵게 문자를 배우고 글을 썼다. 그러한 배움의 과정을 비롯한 삶의 한 편린들도 귀하게 여겨 거의 일상의 모든 것이 글로 전각되었다. 물론 삶의 후반부는 한 집안의 주부로서의 삶이고 그 삶도 모두 글이 되었다. 조선후기 문학사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업적을 남겼지만 지금까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시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남아 있다. 이는 물론 전반적으로 한국에서 여성들의 업적과 존재가치를 남성들의 그것에 비하여 평가절하해 온 남성중심적이고 여성차별적인 관습에 기인한다. 또, 같은 여성문학인 중에도 문학적 수준보다는 남성들의 입에 회자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은 명문귀족의 집안이거나 세인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소위 유명인들을 중심으로 평가해 온 한국 문학사의 오랜 병폐에서도 비롯된다. 기존의 문학 연구나 문학사 기술이 문학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예나 지금이나 영향력 있는 남성들이나 그 집안과의 관계로, 다시 말해 신사임당이나 허난설헌 같은 이는 작품으로서도 상당한 수준에 있었지만 율곡의 어머니라든가, 허균의 누이라든가 하는 위치 때문에 더욱 세인들의 관심과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그것이 곧 바로 문학 연구자들의 관심과도 일치하게 된 것이다. 황진이나 홍랑 같은 기녀들은 기생이란 신분 때문에 명사들과의 교분을 가질 수 있었고, 그 계기로 더욱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에 비해 김삼의당은 자신의 문학 이외에는 별다른 화제 거리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녀가 남편과 동년, 동월, 동일생이며 같은 동네에서 생장했다는 사실이 세인들의 관심을 끌어 일부 지역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정도이다. 이제 김삼의당의 문학사적 위치는 문학 이외의 다른 요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문학을 통해서 논의되고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중국 문화의 대표적 산물의 하나인 한자를 표현도구로 하여 창조되는 한시는, 그 성격상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배제하기는 어렵다. 자칫 중국의 아류로 전락하기 쉬웠던 우리의 한시 문학이 중국에 못지않은 높은 문학성을 지니게 된 것은, 여러 세기에 걸쳐 활약한 우리나라의 많은 문인들의 공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뛰어난 여러 시인들 중 여성시인은 손을 꼽을 정도로 적다. 이는 근세 이전의 우리 사회가 극도로 여성에게 폐쇄적이고 남성위주의 사회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환경적 제한을 극복하고 자신의 감성과 문학적 역량을 후대에 남길 수 있었던 많지 않은 수의 여성시인들은 우리 문학사나 여성사에 획기적인 보물들이다. 그들은 남성중심 일변도의 문학사를 보완하여 우리의 문학적 자산을 더욱 알차고 풍부하게 만들어 주었다. 지금까지 작품이 전해지는 여성시인들은 위로는 여왕이나 정경부인에서 아래로는 기녀나 죄수까지, 몇 안되는 수에 비해 실로 다양한 계층을 형성하고 있다.
우리 고전 여성 문학 중 여성시조는 대부분 기녀(妓女)에 의해서 창작되었다.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시조들 가운데 여성의 작품으로 분류되는 시조는 59수 정도이다. 이중 신분이 밝혀져 있는 작가는 모두 기녀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시조가 기녀들이 참석한 연회에서 유흥을 돋우기 위해 지어지고 불려졌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들 작품의 대부분은 기녀들의 생활 주변이나 윤리관에 의해 설정된 내용임은 물론이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이별이나 만남을 주제로 한 것이 59수 중 49수에 이르며, 그중에서도 이별을 주제로 한 것이 32수나 됨을 알 수 있다. 즉, 고전 여성 시조는 거의 임을 그리고 임과의 이별이나 만남을 노래한, 이른바 '임의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고전 여성작품 중 덜 비판을 받으며 남아있게 된 작품의 대부분은 부권주의(父權主義)사회와 가부장적 국가에 필요한 남성위주의 사상과 남성을 위한 '모성적문학(母性的文學)'류이다. 그러나 이같은 작품도 남성들의 시조에 비하면 보다 자유로운 심상과 여성 특유의 섬세한 감정을 유감없이 표출한 문학작품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삼의당 김씨는 1769(영조 45)년에 전라북도 남원 누봉방(樓鳳坊)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당호는 남편이 지어준 삼의당(三宜堂)이다. 같은 동네, 같은 해, 같은 날 출생이며 같은 마을에 살던 담락당(湛樂堂) 하립(河笠 1769~1830)과 혼인하였다. 이들 부부는 나이도 같거니와 가문이나 글재주가 서로 비슷하며 서로를 귀히 여겨 주위에서 천정배필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잘 어울리었다. 이 부부는 '꽃같고 달도 같은 님을 마주 대하노니/ 그 뉘 세간 영욕이 이보다 더 하리오.' 하면서 서로 위하고 중년에는 선영(先塋)을 수호하기 위하여 진안 마령면(馬靈面) 방화리(訪花里)로 이주하여 거기에서 시문을 쓰면서 일생을 마쳤다.
그녀가 문집에 전각하듯 남편 하립이 그 부인이 거처하는 집의 벽에 글씨와 그림을 가득히 붙이고 뜰에는 꽃을 심어 '삼의당'이라 불렀다 한다. 그녀는 남편과 가문이 필요로 하는 등과에 적극 협조하여 산사(山寺)에서 독서하고, 한양으로 관광하는 일을 진심으로 권장하였다. 가세가 궁핍하였기 때문에 경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머리털을 자르기도 하고 비녀를 팔기까지 하였으나 남편은 결국 등과하지 못하였다.
그녀는 남편에게 권학하는 글을 많이 썼으며, 가장 규범적이며 교훈이 되는 글을 많이 썼다. 죽은 해는 알 수 없으나 6월 20일에 죽었다고 하며 묘는 진안 백운면 덕현리에 그 남편과 함께 쌍봉장으로 되어있다. 진안 마이산(馬耳山) 탑영지(塔影地)에는 시비 "담락당하립삼의당김씨부부시비(湛樂堂河笠三宜堂金氏夫婦時碑)"가 세워졌다. 문집으로는《삼의당고》2권이 1933년(경오년)에 간행되었는데, 여기에는 시 99편과 19편의 산문이 수록되어 있다. 《삼의당고》는 조선 후기의 여성문인 김부인의 시문집이다. 2권 1책으로 석인본이다. 1930년 정형택, 김기현 등에 의하여 편집되어 1933년에 간행되었다. 권두에 정일섭의 서언과 오상철의 서문이 있고 서(書) 5편, 서(序) 7편, 제문 3편, 잡지 6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의 주된 내용은 여성교육 및 남편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을 노래한 것이다. <부자거산수년근기업수부훈장입우경첩이시증지(夫子居山數年勤基業受父訓將入于京妾以詩贈之)>는 남편이 과거를 보러 서울로 올라갈 때 그를 격려한 시이다. <부자재경유서미부이시첩화지(夫子在京有書尾附以詩妾和之)>는 남편이 서울에 있는 동안 편지 끝에 시를 부쳐오자 이에 화답한 것으로, 대장부가 여아에 연연하지 말고 대망을 풀어 임금을 요순과 같이 만들라는 격려의 내용이다. 한편, <춘규사> 8수는 봄날에 남편을 그리는 여심을 노래한 것으로 매우 서정적이다. 그 밖에 <오동우>,<도의사>,<절류?gt; 등도 남편을 그리는 아내의 하소연을 나타내었다. <십이월사>는 일년 열두달의 절서에 따라 계절의 감흥과 민속을 읊은 내용이다. <부자어산양매전수경근력가색(夫子於山陽買田數頃勤力稼穡)>은 그의 남편이 전답을 장만하여 농사를 지을 때 지은 농구 8수로 농부가 느끼는 희비의 감정을 잘 묘사하였다. 서(書)의 <여부자서>는 남편의 낙방소식을 안편에 듣고 부친 편지로서 지난해는 머리를 깎아 남편의 양식준비를 하였고, 올 봄에는 비녀를 팔아 여비를 마련하였으나 이 한몸의 물건을 다 팔아서 없앨망정 남편의 여비를 부족함 없이 대고자 하는 것이 자신의 진실한 심정이라는 내용으로, 남편에 대한 아내의 간절한 애정이 담겨있다. 잡지의 <예성야기화>는 혼례를 치르고 첫날밤 남편이 이야기한 것을 기록한 것인데, 부부간에 사랑이 변하지 않을 것을 서로 다짐하는 내용이다. <문앵기사>는 가난에 쪼들리다 진안에 전토를 마련하여 이사한 뒤 숲속에서 들려오는 꾀꼬리의 아름다운 울음소리를 듣고 지은 것으로 새로운 기대감을 표현하고 있다. <우귀일기화>는 시집가던 날의 일과 심정을 기록한 것이며, <계유가정문>은 여자가 가정에서 지켜야 할 교훈적인 내용을 기록한 글이다. 모두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1982년 『김삼의당 시문집(金三宜堂 詩文集)』으로 재편집되어 출간되었다. 서정주가 서(序)를 썼다.
조선시대의 유교적 윤리관에 의해 규제된 사회 여건에서 여성이 시를 창작하면서 문예생활을 한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었다. 여성들에게는 유교적 부도만이 강조되는 가운데 가정 교양과 봉제사, 객의 대접 등을 주임무로 하는 가사만을 도맡아야 하므로 책을 대할 기회마저 없었기 때문이다.
18세기에 이덕무 역시도 '부인은 경서와 사기, 윤리, 시경, 소학 그리고 여사서나 대강 읽어서 그 뜻을 통하고 여러 집안의 성씨, 조상의 계보, 역대의 나라 이름, 성현의 이름 등을 알면 족할 뿐, 허탕하게 시조를 지어 외간에 퍼뜨려서는 안된다' 라고 하였으니, 비록 숨어서 문학을 하고 시를 썼다 해도 이를 외부에 발표할 수가 없었고 발표하였다면 이는 부도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지탄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다행히 영․정조대에 이르러 실학사상과 함께 발흥된 문학적 기운은 마침내 여성문학의 발달에도 새로운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문학에 향심하는 여성일지라도 그들의 작품만은 대부분 숨겨놓아야 했고 발표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김삼의당은 자신의 작품을 스스로 정리하여 거기에 <자서>까지 얹어 놓았으니, 실로 남다른 데가 있다.
정조 임금이 왕위에 오른 뒤 친교가 아름답고 밝아져서 인재와 큰 선비가 많고 민요가 성하게 일게 되니 어진 아녀도 잇따랗다. 나라의 고을 고을마다 태평가가 끊이지 않아 시골 규녀자들까지도 흥겹게 교화되어 예와 문물의 볼품이 많아졌다. 나 또한 호남 구석의 한 여자로서 깊이 묻쳐 자랐고, 널리 경사는 배우지 않을지라도, 소학언해로 글자를 배우기 시작하여 제자백가를 섭렵했다. 글을 구사함에 있어서 어찌 세상 사람들의 빈축을 받겠는가. 다만 뜰안에서 보고 듣고 살핀 것을 말이나 시로 정이 가는대로 붓을 적신 것을 스스로의 뒷날의 거울과 규례로 삼고자 할 따름이다.
이 <자서>를 통하여 첫째, 김삼의당이 태어나서 성장한 시대적 배경을 알 수 있고, 둘째, 김삼의당의 학업과 학문의 경지를 알 수 있으며, 셋째 시나 그 밖의 문장을 쓰는 목적 즉, ' 다만 내 스스로 뒷날에 좋은 거울과 법도를 삼고자 했다'는 데서 외부에 발표하려는 의도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자서>를 쓴 것은 내적으로나마 가전(家傳)코자 하는 의욕에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닌가 싶다. 김삼의당에 대한 문학형성의 배경과 그 요인을 보면 첫째, 김삼의당이 문학을 시작하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킨 데는, 우선 김삼의당에게 천부적 문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빈한하고 힘든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정규적 교육을 받지 못했고, 더구나 여자였기 때문에 한문을 깊이 공부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당의 담벽에 몰래 붙어서 학동들의 글 읽는 소리와 훈장의 가르치는 소리를 엿듣고서 그토록 뛰어난 작품들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김삼의당은 여성으로서의 한과 안타까움이 가득차 있다. 우선 그녀는 뛰어난 자기의 재주를 어디에고 마음껏 펼칠 기회가 없었다. 유교적 여성상을 멀리할 수 없던 시절, 그녀는 남편의 뒷바라지와 가족들의 뒷치닥거리로 자신의 활동 반경을 제한해야 했다. 김삼의당은 남편의 빈번한 과거의 실패와 딸 셋의 죽음, 40이 되도록 아들을 낳지 못한 것 등, 이러한 일련의 사건에서 오는 마음의 고통을 문학으로 승화시켰다. 조선사회는 남성의 우위를 본질적으로 인정하는 정책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김삼의당 부부 사이는 남녀의 차별을 두지 않는 가운데 화목한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시에 있어서는 묵과 붓처럼 서로 어울리어 화답하는가 하면, 사이좋은 맞수로 고금 시론을 겨루기도 했음을 볼 수 있다.
외적 요인으로는 김삼의당이 33세까지 살았던 남원이나, 그 후에 이주해 살았던 진안이 모두 조용하고 아름다운 지리적 자연환경이었음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김삼의당에 있어 시의 소재가 되었다. 자연속에서 기쁨을 느끼고 새들의 소리를 음악으로 들으면서 김삼의당은 세상의 온갖 욕심도 멀리 하면서 문학 활동을 유일한 낙으로 삼았던 것이다. 여기서 김삼의당은 다시 한 번 시골 생활의 즐거움과 그것이 자신의 문학 활동에 미치는 영향을 완곡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처럼 김삼의당이 살았던 자연 환경은 그녀의 문학 형성의 요인이 되었으면서 동시에 그녀의 문학적 성격을 결정 짓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사회적 환경으로는 조선후기 실학사상이 대두하여 평민계층에서 새로운 자의식이 일게 됨에 따라 문학계에도 실학의 물결이 들어 왔던 점을 들 수 있다. 이런 상황은 남성사회에 비친 현실이었으나, 여성계에도 결코 무관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이 시기는 서민문학이 크게 대두되고, 그와 아울러 여성들의 문학생활도 크게 신장되는 현상을 보인다. 여성들이 직접 작품을 짓기도 하고, 국문소설이나 사설시조, 가사 등의 독자층을 형성하여 제반 문학의 발전에 기여한다. 이 같은 사회적 분위기가 김삼의당에게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쳐 그녀의 문학이 더욱 성숙하고 심화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문학사적으로 김삼의당은 시인으로서는 드물게 농삿일 하면서 글을 쓴 여성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녀의 시작품은 260여수에 이르고 있으며, 이는 다른 어느 여성시인보다도 많은 작품이다. 뿐만 아니라 그 시의 수준도 여러 논평자들이 인정할 만큼 높은 수준에 올라 있다. 또한 김삼의당은 여염집 부녀자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여성시인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높은 가문의 부녀자나 기생의 신분으로서는 간혹 한시를 짓는 경우가 있었지만 평범함 여염의 부녀자로서 한시를 남긴 경우는 그리 많지 않으며, 특히 시집을 남긴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김삼의당이 있음으로 해서 시인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혀지고, 시의 성격에 대해서도 새로운 이해가 가능하게 되었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조선 시대의 시인은 남녀를 막론하고 중국시를 모방하거나 중국시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한 감이 있다. 이는 시의 소재나 기법 등에서 중국의 영향을 즐겨 나타내려 하기 때문이었다. 이에 반해 김삼의당의 시에서 중국고사의 애용이나 중국시인의 기법을 모방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몇몇 작품에서 그런 시도가 보이지만 그것은 극히 미미한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김삼의당의 문학은 부부 및 모녀 화합의 모습을 담고 있다. 조선 시대의 유교 규범은 부부를 내외간으로 표현하면서, '남불언내, 여불언외'의 원칙대로 별거하도록 요구했다. 남녀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일은 부부사이라 하더라도 금기시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조선시대의 문학 가운데 부부간의 정상적 사랑을 노래한 작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고작해야 한 두 마디 문안 편지를 보낸 경우가 보이고, 아내가 죽은 후에 그 사람을 드러내 보이는 경우가 있을 뿐이다. 이에 반해서 기녀와 수작한 내용은 상당수 남아 있어서 자칫 남녀의 정은 비정상적 통로로만 표출된 듯한 오해를 하게 된다. 그러나 김삼의당의 시에서는 이같은 금기가 사라지고, 부부간의 문학적 교통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 부부는 혼인이 이루어지던 날 밤부터 시작해서 죽는 날 까지 끊임없이 시화(詩話)를 지속해 나간다. 시와 문을 통한 차원 높은 대화를 실현한다. 김삼의당이 먼저 보낸 시도 있고 남편의 시에 화답한 것도 있어 그 수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정도에 이른다. 그들 사이에 주고 받은 내용은 서로 안부를 묻는 시에서부터, 학업을 권면하고, 함께 경치를 감상하고, 서로 이념을 논하는 데까지 이른다. 그들 사이의 시적 대화는 서로 떨어져 사는 동안에 주로 이루어졌지만, 함께 지내는 동안에도 계속되었다. 또한 삼의당의 글 속에는 모녀지간의 애틋한 정도 철철히 넘치고 있다. 군신간, 부자간의 질서나 정이 주로 소재이던 사회에서 모녀간의 정을 주제로 한 글을 찾아보기는 흔치 않은 일이다.
김삼의당의 시문학사적 의의를 살펴볼 때 우선 그녀는 조선 후기 시인으로서 충분한 위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그녀의 시는 난해하고 공허한 관념세계에 머물지도 않고, 저급한 폭로 문학이나 고발문학의 성격도 갖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연약한 감상주의나 경색된 이념의 산물도 아니다. 그녀의 시는 살아서 숨쉬고 건강한 생활인의 의식과 사고를 담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김삼의당의 문학을 여염부녀자의 건강한 문학으로 인정하고 평가할 수 있다. 그녀가 노래하는 사랑은 비정상의 애정이 아니다. 부부간의 건전한 애정이다. 그녀가 노래하는 풍경과 문학을 통해서 한시문학의 새로운 국면을 볼 수 있을 것이며, 김삼의당의 모습을 통해서 시인 특히 일상에서 묻혀 글을 쓰는 일을 삶의 정수로 여기며 그것에 지탱해 사는 여성시인의 바른 면모를 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