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게시물 227건, 최근 0 건
   
[문화행사]

남원의 누정과 풍류

글쓴이 : 관리자 날짜 : 2005-03-06 (일) 23:43 조회 : 4455
                                            남원향토문화연구회 전문위원 이 남 일(李南一)


1. 누정과 선비 정신
누정은 옛 선비들의 휴식처라는 점에서 누정의 조영(造營) 조건과 성격을 이해하려 면 조영자의 주체인 선비의 의식구조와 성향에 대한 설명이 우선되어야 하겠다.
옛날의 선비는 유학사상을 통해 학문과 덕행을 갖추었으며, 인간의 가치 기준을 재주 보다는 덕에 두었다. 언행에 있어서 불의를 용납하지 않고, 몸가짐을 공손히 하였으며,
청렴과 겸양의 예로써 처신하였다.
선비들의 충효․신의․검약․예절․정신은 우리 사회를 지탱하고 발전시켜 오는 데 에 매우 큰 역할을 하였따. 우리는 이러한 선비 정신을 본받기 위해서 훌륭한 옛 선비들의 모습을 재조명해야 한다. 전통은 바뀔지언정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1) 학문과 자기수양
『예기』「유행편」에 의하면 선비는 널리 배워 모르는 것이 없고, 독실히 행하여 게으름이 없으며, 산림에 묻혀서도 음란하지 아니하고, 벼슬에 나가서는 모자람이 없다 하였다.
지식계급이었던 선비의 지상 목표는 입신양명에 두었다. 과거에 등과하여 관료로 나가는 것이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는 유일한 기회이자 목표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뜻을 이룰 수 있는 것은 극소수에 불과하였다. 학덕을 갖추었으면서도 벼슬에 나아갈 기회를 갖지 못한 사람들은 때를 만날 때까지 처사로서 그 역할을 다하였다.
조용히 은거하다 때를 만나면 벼슬을 하는 것이 선비의 떳떳한 일로 생각하였다. 도를 배우고서 실천하지 않으면 이는 안 배움만 못하고 부끄러운 일로 생각하였다.
입신양명을 지상과제로 삼았던 삶의 방식에 부작용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본인의 뜻과는 상관없이 가문의 영예를 위하여 벼슬을 통해 벼슬길을 모색하여야 했다. 그래서 자식의 입신을 통해 가문을 일르켜 세우는데 온 가족의 희생까지도 흔쾌히 감수하였다.
이는 현대까지 이어져 자식에 대한 부모의 지나친 기대는 많은 사회 부조리를 낳게 되었다.
그러나 선비 정신의 근간은 학문이 출세의 도구가 아니라 인격완성과 도덕의 실천에 있다.
그들은 나름대로 삶의 철학과 원칙을 가지고 처세하였다. 입신을 초월해서 현실정치와 사회 흐름을 비판하고 인간 본연의 자세를 지키는 처사로서 삶을 산 것이다. 현실 체제에 예속되지 않는 당당한 초월의 경지에 서서 정의 실현에 혼신을 다하며 삶의 진정한 방향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이는 높은 학문적 식견과 상생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다라서 이러한 정신이 길이 보전되기를 갈망하며 산림처사로서 후세 교육에 전념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선비들의 견제와 조화를 통한 처세야말로 지금의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여당과 야당의 합리적 정치구도를 이루는 이상정치를 떠올리게 한다.
다시 말해 선비정신이란 인격의 완성을 위해 끊임없이 학문과 덕성을 키우며, 대의를 위하여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는 지조 의식을 말한다. 선비의 기본 소양인 학덕을 겸비하기 위해서는 부단한 자기 연찬과 수양이 따라야 하는 것이다.
오늘의 행위는 후세의 모범이 된다고 여겼기에 덕을 갖춘 존재로서 사회의 표상이 되고 존경받는 인격자로서 자신의 삶을 이하여 인격 도야에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이다. 글을 배우고 인품을 다듬는 일이야말로 선비의 삶의 전부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고고하게 삶을 영위하게 위해서 행하는 가장 최선의 방책이기도 하였다. 그 학문과 자기 수양의 공간이 바로 누정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2) 風流성향
선비는 은일자중하며 겸손한 예술인이었다. 도가적 자연주의 사상과 함께 학문의 정진과 인격 도야의 한 방법으로 누정문화를 꽃피웠다. 일반 민중과는 거리가 있지만 자연을 벗하며 고고한 삶을 구가했던 터전이 바로 누정이었다. 입지의 뜻을 이루고자 혼신을 다하면 결국 인생의 깊은 뜻을 깨닫게 되고 그 깨달음은 인간이 보잘 것 없는 자연의 일부임을 알게 된다. 온갖 부귀 영화를 누려 본들 결국 늙으막에 찾아 드는 곳이 바로 자연 속에 자리한 정자이다. 누정은 바위와 물과 노송을 배경으로 이들 요소가 지닌 독특한 이미지를 통해 자연을 닮으려 하였다. 한가한 정자는 자연의 품속이며 자연과 대화를 나누는 유일한 찻집이다. 자연의 입이자 귀이다. 이 조용한 찻집은 누구든 다가서면 흔쾌히 자리를 내어 주며 포용한다. 정자에는 자연과 하나가 되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자연 속에 인간을 가두는 도피처라기보다 자연 그 자체에 사람이 안기는 포용의 미학이 서린 곳이다. 자연주의와 선비정신이 5백년 조선을 이어온 사상과 정신이라면 조금은 겨머하게 다가가 보아도 좋을 것이다.
풍류라 하면 음주가무와 여자의 색으로 오해할 수도 있으나 사실 선비는 색을 멀리 하였다(色).선비는 사랑할 수는 있으되 겁탈할 수는 없고, 가까이 할 수는 있되 핍박할 수는 없으며, 죽일 수는 있으나 정조를 뺏을 수는 없다고 하였다.

3)은둔성향(隱遁性向)
인격이 높은 선비일수록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산림에 묻혀 도학(道學)과 덕행을 쌓는 것으로 본분을 삼았다.
선비는 하늘을 우러르며 한 치 부끄럼 없기를 바랬다. 백로는 까마귀와 어울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던 선비는 스스로 소인배들과 어울리지 않고 군자처럼 고고하게 사는 방법을 택함으로써 속세를 멀리하였다. 남의 나쁜 행실을 접하면 교화될까 염려했듯이 남의 과오를 외면하였다. 뿐만 아니라 간섭이나 조언도 꺼렸다. 이러한 서민의식은 잣칫 남을 무시하고 천하게 여기는 계급사상을 심화시킨 결과로 나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우월감은 오늘날 개인과 집단간의 위화감을 조장하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이는 개인주의적 자기 보신처럼 보일지 모르나 이기적인 자기 탐욕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남을 위해 k지 않고 자세야말로 이상적인 자유를 얻는 방법이라 생각한 것이다. 세속에 물들이 않고 때묻지 않은 순수성은 청렴결백과 지조의 아름다운 행실을 나았다. 어떤 처지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고고한 정신이야말로 선비의 가장 향기로 운 멋이기도 하다.
선비는 바람처럼 물처럼 사는 것을 원했다. 그래서 자연을 닮고, 자연의 이치를 존중 하였다. 특히 도가와 노장 사상에 심취한 사람들이 많았으며 음양 오행설이 우주를 보는 물질관
의 바탕을 이루고 있었다. 선비는 경천(敬天) 사상과 도선(道仙) 성향이 강하였다. 이백의 산중문탑(山中問答)에서 선비의 이상은 자연과 닮으려 했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왜 깊은 산중에 사느냐고 묻길래 / 웃기만 하고 아무 대답 안 했네.
복사꽃잎 아득히 물에 떠가는 곳 / 여기는 속세를 등진 별천지라네.
(한자모름)

선비의 인품은 물가에 띠집으로 정자 삼아 자연을 음미하고 자연의 뜨에 거스리지 않고 순종하는 자세에서 배운 것이다.

4)충효성향(忠孝性向)
효행(孝行)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륜의 중요한 덕목이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던지는 정신은 곧 민족을 보호하고 나아가 국가를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던진다. 이처럼 선비는 일신의 영달이나 물질적 추구보다는 정신적 가치를 중히 여겼다. 나보다 국가와 민족을 먼저 생각하고 이를 과감히 실천에 옮겼다. 보수적이면서 충의적 호국사상을 충효정신의 근간을 이룬다.
충효정신은 부모에 대한 공경(恭敬)을 바탕으로 한 효를 근본으로 한다.
인류는 천재(天災)와 끊임없는 난세(亂世)의 폭정으로부터 자신들의 생활을 지키기 위해 혈조이 동거하며 가주장제 가복을 구성하여야 했고, 이런 구성원들이 부모를 봉양하고, 공겨아고, 복종하고, 조상에게 봉제사(奉祭祀)하는 일은 필연적이다.
부모를 공경하고 예로써 제사를 받들며 효를 실천함으로써 천하를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시대가 바뀌면서 충효정신은 국가와 사회의 중요한 도더규범으로 정착되었다.
조선시대 효는 삼강오륜에 의한 엄격한 가정교육을 통해 배우고 익혔다. 과거 반인륜 적인 범죄행위는 지금처럼 걱정되는 정도가 아니었다. 서구의 자본주의 체제가 도입되고 물질만능주의에서 핵가족 시대로 변하면서 충효사상은 그 빛을 잃고 오직 실용주의에 입각한 개인주의가 난무하였다. 자식에 대한 맹목적이고 무조건적인 자식 사랑에 자식이 성장해서도 오직 주는 것만이 자식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부모들은 더 이상줄것이 없어 자식들에 냉대
받고 버림받는 역효가과 나타났다. 이는 엄한 가정 교육의 부재에서 생긴 결과이다.

2. 남원의 옛 누정
과거 누정(僂亭)은 이러한 선비 정신을 익히고 학문과 자기수양을 통해 인격을 도야하는 공간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곳이다.
누정이란 누각(樓閣)과 정자(亭子)를 이르는 말로 넓게 보아 헌(軒), 당(當), 대(臺), 각(閣) 등을 포함한다. 향촌 또는 낙향 선비들의 휴식처로써 유흥상경(遊興賞景) 외에도 시단과 시문의 산실 및 학문을 통한 자기수양과 강학의 역할을 하였다. 사적으로 사족의 종회(宗會)․마을의 동회(洞會)․개인 별장의 용도로, 공적으로는 활쏘기 수련장․고을의 문투․벼슬아치의 접소 등으로 쓰였다.

<현존 누정>
1) 광한루(廣寒樓)
태종 19년(1419) 남원에 유배 된 황희에 의해 건립된 광한루(廣寒樓)는 누각에 걸려 있는 편액만 해도 80여 점, 200여 수의 시문이 있으며, 점필재 김종직․상촌 신흠․옥봉 백광훈․백강 이경어․송강 정철․천장 송대빈 등 당대 유명한 문필가들을 위시한 시단을 형성하여 남원 시문의 산실이 되었다. 광한루는 평양의 부벽루․진주 촉석루․밀양 영남루와 더불어 조선시대 4대 누각 중의 하나로 그 아름다운 경간을 자랑한다.

2) 최락당(最樂堂)
1600년 경 건립된 최락당(最樂堂)은 송동면 영동리 잿말 입구에 별제공(別提公) 김익기(金翼基)가 건립하였다. 서경덕의 문인으로 차천로, 같은 송동면 출신으로 금구현령을 지낸 장경세, 안동인으로 정철의 문인인 권필, 영의정으로 지낸 김유, 예조판서를 지낸 이안눌 등의 제영이 있다.

3) 무진장(無盡藏)
남운에 조영된 대부분의 누정이 하천과 바위를 배경으로 조영되었듯이 무진장(無盡藏) 역시 대강면 방산리를 돌아 흐르는 순자강변 나루터에 찰방 윤정근(尹廷瑾)이 1600년대 건립하였다. 정철의 아들 정홍명, 양대박 아들 양 경우, 예문관 검열을 지낸 신혼의 제영이 있다.

4) 천사대(天使臺)
주천면 호기리 범실 마을 앞동산 일대를 가리키는 천사대(天使臺)는 정유재란 때 명나라 사신 이종성(李宗成)을 안내하여 풍류를 즐긴 것으로 유명하다.

5) 재간당(在澗堂)
산동면 목동리 나뭇골 북쪽에 있는 재간당(在澗堂)은 재간당 김화(金澕)가 건립 하였다. 그는 선조 36년(1603) 식년에 생원과 진사를 동시에 합격한 재원이었다.
그는 덕행으로 천거되어 참봉에 제수되어으나 벼슬에는 나이가지 않았다. 그리고 심산유곡 같은 이곳에 정자를 짓고 자신의 은둔처로 삼았다.

6) 사계정(沙溪亭)
사계정은 주생면 영천리 유매에 사계(沙溪) 방흥현(房應賢)이 은거하던 건물이다.
1500년대 건축하였고 1609년 손자 방원진(房元震)이 중건하였다. 그는 산속 그윽한이곳 외딴 집을 짓고 유유자적(悠悠自適)한 생활로 음풍농월(吟風弄月)하며 많은 선비들과 고유하며 보냈다.
이항․노수신․노식․노진 등의 글이 걸려 있으며, 영의정 노수신, 남원사람으로 김인후의 문인이자 사위이며 이조좌랑을 지낸 조희문, 이정구, 권필(정철의 문인), 정홍명, 방원진의 제영이 있다.

7) 영사정(永思亭)
영사정은 금지면 택리네 상궈 마을 순자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있다. 중종14년(1519) 사제당(思齊당) 안처순(安處順)의 아들 명종 8년(1553) 죽암처사(竹巖處士) 안전(安瑑)이 건립하였다. 현재 21개의 현판이 있으며, 중국의 사신 주지번(朱之藩)의 dksrmfTL로 정자 이름을 편애갈 만큼 유서 깊은 정자이다.
관찰사 안위,김인후, 명나라 부총병 사대수, 오종도(명의 장수)의 제영이 있다.

8) 풍암정(偑巖亭)
풍와(楓萵) 안신손(安信孫)이 정유재란 때 의병으로 활약하다 돌아와 건립한 정자이다.
원래는 이백면 남계리 닭메(계산) 북쪽 풍암이라는 바위 dnlWHr에 위치하였다.

9) 봉황정(鳳凰亭)
대산면 대곡리 대실 마을에 생원 진준(陣儁)이 대 위에 건축하였다고 하였다.
『용성지』에 조희문이 쓴 봉황대기에 의하면 본인의 과거 급제 때는 물론,고려 때 판서를 지낸 이동미와 그 사위이자 조희문의 고조부인 조종례․부친조림․조형조히하가 문과 급제할 때와 이웃인 진준(생원․진사)․조형 조희안․조카 조자윤이 사마 시험에 합격했을 때 봉황대 바위가 울었다고 한다.
김인후(옥과 현령. 정철․조희문 등의 스승-장성). 조희문(홍문관 교리,김인후 사위-남원).조림(사성-남원), 허찬(시마시)

10) 호암정(湖巖亭)
덕과면 만도리 은행정 마을의 호암서원으로 추정된다. 13년(1789)에 유림이 건립하였다가 고종 5년(1668)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폐쇄되었다가. 현재 사우는 1960년에 세워져다.
영의정을 지낸 이서와 정여영의 제영이 있다.

11) 퇴수정(退修亭)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 652 매동. 도로변 냇가 반선대 남쪽에 위치한다.
고종 7년(1870)에 매천(梅川) 박치기(朴致箕)가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하던 곳이다.

12) 오리정 (五里亭)
오리정은 조선조 경국대전에 각 고을에 오리쯤 떨어진 곳에 의무적을 세우도록 제도화된 정자이다. 현건물은 1953년에 세워진 정잘 남원시 사매면 월평리 춘향고개 도로 변에 위치한다. 고대소설 춘향전의 성춘향과 이몽룡이 이별의 정을 나눈곳이다.
<누정명과 유래>
누정은 보통 어떤 것이든 건립하게 된 연유가 있게 마련인데 그 이름만 보아도 누정의 성격을 이해할 수 있다. 누정의 명칭이 세겨진 현판은 삼자횡서(三字 橫書) 일반 적이다. 남원 지역의 누정을 대략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부근의 자연과 관련된 명칭 : 축천정(丑川亭), 화산정(花山亭), 비안정(費眼亭-  ), 용두정(龍頭亭), 봉황정(鳳凰亭), 월파정(月波亭), 호암정(湖巖亭, 칠송정(七松亭), 여원정(女院亭)
②인물의 호칭과 관련된 명칭 : 이안정(怡顔亭), 재간당(在澗堂), 풍암정(楓巖亭=-  ), 비래정(飛來亭), 둔세정(遁世亭), 제호대(霽湖臺), 사계정(沙溪亭), 도탄정(挑灘亭), 운제정(雲提亭)
③ 한시 구절 또는 고사와 관련된 명칭 : 광한루(廣寒樓), 무진장(無盡藏)-다함이 없는 덕)
④ 누정명은 임금의 하사나 유명 인사에 의해 명명된 것이 유명,
⑤ 상징이나 염원의 의미 : 보인당(輔仁堂), 최락당(最樂堂), 각노정(却老亭), 청게당(廳溪堂), 첨의정(瞻依亭), 도산정(道山亭), 영사정(永思亭)

3. 고전 문학의 배경 남원
1) 최척전을 쓴 조위한이 건립한 도산정(道山亭)
『용성지』에 의하면 도산정은 주생명 제천리 월파정 tjWHrdp 있었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도산리 도산 마을로 추정되는 곳이다.『용성지』에 의하면 아래로 작은 시내가 흐르는 거북이 모양을 한 평평한 바위 위에 현곡(玄谷) 조위한(趙媁韓)이 건립하였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해에 의병장 김덕령을 따라 종군하였고, 광해군1년(1609)증가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따.1613년 선조 장인 김제남의 무옥(誣獄)때이 같이 등과 했던 정협(남원 부사 역임)의 고변으로 여러 조신들과 함께 구금되었다. 그후 노모를 모시고 남원으로 내려가 은거하다 10년후 인조반정으로 재 등용되어 공조참판을 역임하였따.
효성이 지극하였고 글과 글씨가 뛰어났으며 해학에도 능하였다. 광해군 13년(1621)에 그가 남긴 『기우록』의 「최척전」은 전쟁포소를 소재로 한 피로문학으로, 홍도전과함께 남원을 무대로한 우명한 고전소설이다. 좌성지를 지낸 현주 조찬한의 형으로, 월파정․비안정에 그가 시가 있다.
2) 광한루에 시를 남긴 김시습
매월당(梅月堂)김시습(1435-1493)은 어찌하여 이곳 남원 광한루에 이 시를 남기게 되었을까?
생육신의 한 사람이기도 한 그는 서울 성균관 부근에ㅓ 태어났다. 다섯 살 때부터 글재주가 뛰어나 신동으로 불렸던 그는 세종이ㅔ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타고난 운명이 순탄치 못하였던지 중이 되어 전국을 돌며 방랑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런 생화속 에서도 그는 탁월 한문장으로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특히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집인 『금산오신화』에 「만복사저포기」를 남긴 것이 유명하다. 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 양생(梁生)은 일찍이 부모를 여읜노총각이다. 항상 외롭게 살아갈 수는 없어 아름다운 배필을 짝지어 달라고 부처에게 기원한다. 어느날 만복사의 불당을 찾아가 불공을 드리던 그에게 부처님은 그의 소원을 들어주고자 더포놀이로 내기를 자청한다. 여기서 양생이 이겨 약속대로 부처는 한 여인을 양생과 만나게 하는데 그 상대는 3년 전에 죽은 여인의 환신이다. 양생은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3일간 사랑은 그 여인이 저승으로 돌아감으로써 끝난다. 그 후 양생은 지리산으로 들어가 혼자 약초를 캐며 살았다. 곧, 이작품은 불교의 발원(發源) 사상으로 시작해서 윤회(輪廻) 사상으로 끝을 맺고 있다.
작품의 배경은 남원의 만복사이다. 작자는 당시 이름난 명승지였던 남원을 찾아 광한루에도 올라갔을 것이고, 만복사도 찾았을 것이다, 근ㄴ 여기서 얻은 구상을 작품화하였을 지도 모른다.
현재 남원시 서쪽 왕정동에 위치한 만복사는 기린봉의 정기를 모아 창건된 사찰이다.
이곳은 옛날 수풀이 무성하여 온갖 새들이 깃들어 있는 경치가 무척아름다웠다고 전한다. 창건 연대는 고려 문종때 또 신라 말이란 설이 있어 확실치 않다. 어떻든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보면 동편에는 5층전각이 있고, 서편2층 전각 안에는 11m가 넘는 구리불상이 있었다. 규모가 큰 사찰로 저녁나절이 되면 승려들이 시주를 마치고 돌아오는 관경이 장관이었다고 한다. 만복사귀승(萬福寺歸僧) 또한 옛 용성 8경을 하나로 꼽았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모두 소실되고 지금은 터만 남아 당시 의 웅장했던 규모를 짐작할 따름이다.

   

총 게시물 227건, 최근 0 건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7
국사봉 답사.... 국사봉(475m) 등산.... 전주 남원방향에서 운암방향으로 잠시 길을 돌려 잠시 주차공간에서 기달린다. 잠시 휴식을 취하자 일행차량이 도착하여 뒤를 따른다. [img1]20여분 달리자 옥정…
관리자 03-07 1403
6
- 소설「혼불」의 작가 최명희님의 넋이 마을노송을 지켜냈다 - 소병호(남원향토문화연구회 고문) 최명희님…
관리자 03-06 1275
5
-남원향토문화연구회 회원 오정희 내가 다니는 답사 활동은 단순한 역사, 문화의 앎만이 아닙니다. 유적지를 다니며 그때를 살았던 그네들의 …
관리자 03-06 1132
4
남원향토문화연구회 전문위원 이 남 일(李南一) 1. 누정과 선비 정신 누정은 옛 선비들의 휴식처라는 점에서 누정의 조영(造營) 조건과 성격을 이해하려 면 조…
관리자 03-06 4456
3
처마에 길다랗게 주렁주렁 매달린 곶감이 달콤해 보입니다. 매번 머리맡을 스치지만 군침만 삼킴니다. 이 곶감은 1년간 선친들 제사에 쓸려고 말린답니다. 어쩌다 한자리가 빈걸 보면서 고민을 합니다. 유혹…
관리자 03-06 1246
2
< 김삼의 당 이갸기 > -남원향토문화연구회 양경님 조선후기 문학사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업적을 남겼지만 지금까지 제대로 인정받…
관리자 03-06 4620
1
김삼의다의 흔적을 찾아서...... **답사코스 향교동 유촌마을:출생(성장)지 - 교룡산성 시비 - 진안이거 정착지(진안군 마령면 계서리 방화마을) - 마령면사무소 - 명려각 . 시비 (진안군 마이산 도립공원) - 진…
관리자 03-06 2735
처음  이전  21  22  23
 
Copyright ⓒ www.ygn21.co.kr. All rights reserved.     contact:
상호(법인)명: 지리산과 섬진강 세상 / 대표전화: 070-4223-4216 / 063) 625-4216 / FAX: 063) 635-4216
주소: 우)590-985 전라북도 남원시 동충동 20-17번지 / 개인정보관리책임자: 박예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