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의 한국은 가난으로 배고픔을 냉수로 달래야 했으며, 6.25전쟁의 상흔이 남겨진 세대였습니다.
농촌사회와 남성위주의 사회에서 여자의 몫은 가사나 밭일이나 하는 처지였습니다.간혹 주변은 가난과 도회지의 동경을 꿈꾸며 도회지로 야반도주하기 일쑤였고, 그들의 삶은 성공보다는 더 큰 아픔과 시련을 겪는 시기였습니다.
이런 사회환경에서의 양경님도 대부분의 주위처럼 오빠들의 뒷바라지로 희생양이 되어야했습니다.
오빠들의 학비나 유학길에 초등학교를 마친 후 집안일을 돌보며 집안의 한몫을 담당해야했습니다.
언제나 향학에 꿈을 꾸던 소녀 양경님!
그에겐 이를 탈피할 행운이 왔습니다.
주변에 있었던 군부대였습니다.
꿈 많은 소녀시절을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살아야하는 기회를 군부대에서 의식있는 군인들의 의지로 야학을 열었던 것입니다.농촌에서 일손을 거들며 살아야할 양경님에게 배움의 기회가 생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농촌소녀들에게 배움의 기회와 의식교육을 실천하는 군인들의 의지로 야학이 열리어 이에 참가할 수 있었습니다.
어두운 밤길을 또래들과 함께 3킬로 정도를 다니며, 공부에 열중하여 향학열을 태울 수 있었습니다.
운이 좋았을까, 다행스럽게도 큰 오빠가 장기복무로 군대를 가고 작은 오빠가 공무원시험에 합격하여 집안이 어려움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검정고시를 합격하고 또래들과 함께 남원여고를 졸업하였습니다.
열심히 공부하였으며, 꿈 많은 여고시절을 보냈습니다.
당시에 주생면 시골에서 여자들에게 대학을 보낸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남자도 아닌 여자가 대학을.............
본인으로서는 대학을 가서 이사회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그에겐 꿈같은 이야기들입니다.
고교를 졸업 후 학원에서 근무를 하고 틈나는 대로 예식장에서 피아노 반주도 하면서 처녀시절을 보내면서도 그중의 대부분을 주변을 돌보는데 주력했습니다.
한샘병 환자들을 찾고 봉사를 하면서 어린이들을 돌보고 교회활동을 하면서 어려운 시절 군복무에 피곤함도 불사하고 졸면서 야학을 하시던 국군선생님들의 노고나 희생을 떠올리면서 사회의 작은 봉사를 기쁘게 담당했습니다.
지금도 잊지 못하는 “너희도 받은 만큼 이 사회에 봉사하라!”시던 당시의 선생님의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말하는 걸 보면 그 당시의 군인들의 열정을 알만도 합니다.
사랑하는 남편을 만나고 어린아이들에 대한 봉사가 하고 싶어 학원과 태권도 체육관을 하면서 피아노교습을 하며, 틈나는 대로 자원봉사활동에 열심히 하였습니다.하지만 언제나 자원봉사를 하면서도 못다한 대학과 자원봉사활동에 대한 전문지식의 필요성을 느끼면서 결국은 40이 되어서 대학 진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사회활동을 하면서 여성운동을 하면서 밤에는 수강을 하면서 더 큰 목표를 향하고 있습니다.
대학에선 사회복지학을 전공하였지만 이것으로는 부족하여 석사과정에선 국문학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아름다운 세상을 알리고 더 많은 사람에게 전달하여 이사회 발전을 이룰 수 있는 표현할 수 있는 아름다운 글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부모의 품에서 성장하면서 자신의 목표를 설정하고 그 길을 보고 달려봅니다.
그러나 그 실천은 많은 노력과 희생을 감수하면서 피나는 노력이 없이는 꿈에 불과 할 것입니다.
양경님은 지금도 앞을 보고 달리고 있습니다.
이사회에 무언가 느낌을 주며, 더불어 잘사는 우리의 삶의 터전을 만들기 위하여 오늘도 발길을 돌리고 있습니다.
언제가 이룩될 그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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