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의 명기 매창(梅窓) 이 잠들어 있는 매창 공원을 찾아서.....
남원이 낳은 조선후기 가장 많은 한시를 남긴 김삼의당을 연구하면서 안타까운 일들이 많음을 느껴본다. 많은 지자체는 과거와 달리 김삼의당처럼 평범한 인물들도 빼놓지 않고 추모하는 축제들을 많이 열고 있는데 그중에 전북의 여성 이매창을 빼놓을 수 없어 평소 나를 아껴 주신 지인들께 매창공원의 안내를 부탁드렸더니 흔쾌히 받아주셨다. 남원에서 담양 고창을 거처 부안까지는 약 한시간반정도 걸릴까?
간단하게 씨레기국에 점심을 먹고 오후 한시가 넘어 부픈 마음으로 매창을 찾아 갔다.
매창은 1573(선조 6)∼1610(광해군 2)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이다. 본명은 향금(香今), 자는 천향(天香), 매창(梅窓)은 호이다. 계유년에 태어났으므로 계생(癸生)이라 불렀다하며, 계랑(癸娘·桂娘)이라고도 하였다. 매창은 아전 이탕종(李湯從)의 딸로서, 시문과 거문고에 뛰어나 당대의 문사인 유희경(劉希慶)·허균(許筠)·이귀(李貴) 등과 교유가 깊었다. 부안(扶安)의 기생으로 개성의 황진이(黃眞伊)와 더불어 조선 명기의 쌍벽을 이루었다. 부안에 있는 묘에 세운 비석은 1655년(효종 6) 부풍시사(扶風詩社)가 세운 것인데, 1513년(중종 8)에 나서 1550년에 죽은 것으로 잘못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의 문집 《매창집》 발문에 기록된 생몰연대가 정확한 것으로, 그는 37세에 요절하였다.특히 유희경의 시에 계랑에게 주는 시가 10여편 있으며, 《가곡원류》 에 실린 “이화우(梨花雨) 흣날닐제 울며 이별(離別)한 님”으로 시작되는 계생의 시조는 유희경을 생각하며 지은 것이라는 주가 덧붙어 있다. 허균의 《성소부부고》에도 계생과 시를 주고받은 이야기가 전하며, 계생의 죽음을 전해 듣고 애도하는 시와 함께 계생의 사람됨에 대하여 간단한 기록을 덧붙였다. 시문의 특징은 가늘고 약한 선으로 자신의 숙명을 그대로 읊고 있는 것이며, 자유자재로 시어를 구사하는 데서 그의 우수한 시재(詩才)를 엿볼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매창은 여성적 정서를 읊은 〈추사 秋思〉〈춘원 春怨〉〈견회 遣懷〉〈증취객 贈醉客〉〈부안회고 扶安懷古〉〈자한 自恨〉 등이 유명하며, 가무·현금에도 능한 다재다능한 예술인이었다. 부안의 묘에 비석이 전하며, 1974년 부안 서림공원에 시비(詩碑)를 세웠었다.
매창공원은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의 부안문화원 뒤쪽에 자리한 이매창 뜸 주변에 조성된 공원이다. 5,400평의 대지에 18억원의 사업비가 투입된 이 공원은 2001년 4월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전라북도 기념물 제 65호로 지정된 매창묘와 이화중선의 동생인 이중선명창의 묘가 있다. 묘는 둥근 원형으로 에워싸고 있어 아담한 느낌을 준다. 주위는 결코 화려하거나 웅장함이 없이 소박한 서민들의 무덤 같은 느낌에 더 애절함을 느껴보았다.
공원 주변에는 다양한 시가 새겨진 시비를 만날 수 있었다.지인이신 김박사님의 말씀을 들으니 이화우 시비를 비롯해, 허균의 시비 "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가 눈길을 끓었다. 이밖에 매창의 시인 "취하신 님께", "어수대", "임생각" 등의 시비를 보며 조선시대 기생으로서 여성의 한을 느끼지 않을수없었다. 매창을 추모하는 여러 시인들의 시비가 세워져 매창의 문학세계를 이해하고 후대들의 산 교육장으로의 손색이 없는 매창공원을 답사하며 남원의 시비공원들 보다 아주 친환경적인 모습을 느꼈다.
또 "부사의 탑" 이라는 조형물을 비롯해, 광장, 야외무대 어린이 놀이터 등의 편의시설과 농구대가 설치되어 체육활동도 가능한 운동장을 보니 김삼의당의 시도 남원의 문화공간으로서 가족들의 나들이에 손색이 없는 요천수와 교룡산성 학생회관등 청소년과 어린이의 쉼터 역할을 하고 있는 남원의 요소 요소에 세워 졌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 보았다.
또한 필자는 남원을 남녀사랑의 대표작인 춘향과 부부사랑의 표본이었던 조선의 실존인물인 김삼의당 혼불 최명희를 통하여 남원을 한국여성문학의 메카로 삼아야 한다는 지론이다.
김삼의당이 개성의 황진이와 더불어 조선의 여류시인으로 쌍벽을 이루던 이매창 (李梅窓)보다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오히려 그 시대의 사회 환경적으로 김삼의당의 문학적 가치는 더 존경받아야 할 부분이다. 글공부하는 것을 집안의 수치로 알았던 시대에 사대부도 아니요 기생도 아닌 여염집여인으로 가장 많은 한시를 지었다는 것은 이시대에 높이 평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타 지역 보다도 남원에서의 무관심은 후대를 산 우리들은 남원의 자존심을 실추시키고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라고 보며 하루빨리 기념사업회가 결성되어 남원의 인물중의 인물로 만들어야 한다.





이중선 묘 앞에서
* 양경님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09-03 20: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