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곡장학회에서 2008년 2학기 장학금 지급 및 하계수련회로 선비문화의 숨결과 호연지기의 기상을 체험할 계획으로 경북권문화유산답사를 가는 날이다.
코스는 안동하회마을과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이 있는 영주시다.
이곳의 소수서원과 소수박물관 선비촌을 소개해보고싶다
먼저 수곡장학회를 소개하자면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자녀를 훌륭히 키우는 것 만큼은 포기하고 싶지 않는 것이 부모의 심정일 것이다. 힘들고 지친 자들에 대한 대책이 완전하지 못한 현실. 또한 이로 인한 제 2 제3의 사각지대가 발생하여, 자녀문제에 대한 대책이 절실하기만 한 요즈음 남원수곡장학회의 장학 사업은 이러한 측면에서 인재양성을 통한 지역사랑의 마음이 더욱 간절하게 배어있다.
사회발전과 함께 야기되어 온 개인 이기주의와 무너진 경제난 속에서 어렵고 힘든 자 들에게 자녀 교육문제는 무거운 짐임엔 틀림없다. 그나마 일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 장학 사업을 하는 독지가 들이있기에....
수곡장학회를 창립하신 故남강 양병식 선생은 남원지역사회의 많은 분들이 아시다 시피 자신에게는 혹독함이 있었지만 타인을 위한 배려는 넉넉하셨던 분이다. 선생께서는 평생에 모아둔 모든 재산을 장학 사업에 투자하시는 과정에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셨다.유가족들은 선생이 남기고 간 가산을 정리하여 13억여 원을 선생의 유업에 뜻을 같이하여 장학회에 기부하는 아름답고 값진 실천을 보여주어 선생의 교훈이 돌아가신 후에까지 이어져, 그 가치는 더욱 아름답게 꽃피고 있다.
관계자들에 의하면 수곡장학회 양해석 이사장은 서울에서 하던 사업을 모두 정리하고 고향 남원으로 내려와 유업을 잇고 있으면서 자신의 사업에서 얻은 수입 일부를 수곡장학회에 기부하고 있다고 한다. 관계자들 역시 더 많은 장학생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자원봉사하고 있으며, 지역사회의 인재양성과 남원미래의 경쟁력 확보에 최선을 다하시며 조금이라도 예산을 절약해 한명이라도 더 장학금을 전달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한 현실에 안타까워하고 있다.
이어 영주시에서 찾은 곳은 소수서원이다. 소수서원은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임금이 이름을 지어 내린 사액서원이자 사학(私學)기관이다. 조선 중종 37년(1542)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을 제사하기 위해 사당을 세웠다가, 중종 38년(1543)에 유생들을 교육하면서 백운동서원이라 하였다. 명종 5년(1550)에는 풍기군수 이황의 요청에 의해 ‘소수서원’이라 사액을 받고 나라의 공인과 지원을 받게 되었다. 중종 39년(1544)에 안축(安軸)과 안보(安輔)를 제사지냈고, 인조 11년(1633)에는 주세붕을 더하여 제사지냈다.
서원의 건물은 비교적 자유롭게 배치되었는데, 일반적인 서원의 배치가 완성되기 이전인 초기의 서원이기 때문인 듯하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강당인 명륜당이 있고, 학생들이 머물며 공부하는 일신재와 직방재가 연속으로 있다. 서원의 일반 배치가 강당 좌우에 대칭으로 동·서재를 두는 것인데 비해, 소수서원은 현판의 이름으로서 구분하였다.
사당은 명륜당의 서북쪽에 따로 쌓은 담장 안에 있다. 서원이 있던 자리에는 원래 통일신라시대의 절인 숙수사가 있었는데, 그 유적으로 당간지주와 초석 등이 남아있다. 소수서원은 조선시대 후기에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며, 지금도 매년 봄·가을에 제사를 지낸다.
소수서원과 소수박물관 선비촌을 둘러보며 선비의 절개와 기개를.....
먼저 소수서원은 옛 절터가 있었던 증거로 입구에는 당간지주가 있다. 건물의 기반석들이 옛 절에서 사용하던 석물들을 그대로 활용한 흔적이 보인다. 소수라 함은 “이미 무너진 교학을 닦게 하였음” 이라는 뜻으로 학문 부흥에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 서원은 조선중종 37년(1542년)에 고려말 안향선생의 사묘를 세워 선생을 주향하고 다음해에 선생의 여정을 봉안하고 학사를 세워 백운동 서원이라 지칭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서원을 답사하면서 옛 선비들의 배움과 질서 특히 자연과 더불어 살아온 선비들의 흔적 속에 서원의 형태와 사당, 서고와 학당 등에서 올곧은 선비정신을 배운 장학생들은 더 큰 포부를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 서원은 풍기< 豊基 > 군수< 郡守 >였던 신재< 愼齋 > 주세붕< 周世鵬 > 선생이 고려말< 高麗末 >의 유현< 儒賢 >인 안향< 安珦 > 선생의 연고지< 緣故地 >에다 조선< 朝鮮 > 중종< 中宗 > 37년(1542) 사묘< 祠廟 >를 세우고 안향 선생을 주향< 主享 >하였으며 다음해에는 안향 선생의 영정< 影幀 >을 봉안< 奉安 >하고 학사< 學舍 >를 이건< 移建 >하여 백운동서원< 白雲洞書院 >을 창건< 創建 >한 데서 비롯되었다. 중종< 中宗 > 39년(1544)에는 안축< 安軸 > 선생과 안보< 安輔 > 선생을 배향< 配享 >하였고 인조< 仁祖 > 11년(1633)에는 주세붕 선생을 추향< 追享 >하였다. 그후 안향 선생의 11대손< 代孫 >이며 경상감사< 慶尙監司 >였던 안현< 安鉉 >에 의하여 보강< 補强 >되었고 명종< 明宗 > 5년(1550) 퇴계< 退溪 > 이황< 李滉 > 선생이 풍기 군수로 재임시< 在任時 > 소수서원< 紹修書院 >이란 사액< 賜額 >을 받게 되어 최초< 最初 >의 사액서원이자 공인< 公認 >된 사학기관< 私學機關 >이 되었다. 회헌< 晦軒 > 안향(1243∼1306) 선생은 고려< 高麗 > 원종< 元宗 > 원년< 元年 >(1260) 진사과< 進士科 >에 급제< 及第 >한 후 우사의< 右司義 > 등을 거치면서 문교진흥< 文敎振興 >에 진력< 盡力 >한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 朱子學者 >이며 안축(1287∼1348), 안보(1302∼1357) 형제도 대학자< 大學者 >이며 문신< 文臣 >이었다. 신재 주세붕(1495∼1554) 선생은 많은 저서< 著書 >를 남겼고 황해도< 黃海道 > 관찰사< 觀察使 >, 동지중추부사< 同知中樞府事 > 등을 역임하면서 청백리< 淸白吏 >에 녹선< 錄選 >되었다. 경내< 境內 >에는 강당< 講堂 >, 동< 東 >·서재< 西齋 >, 학구재< 學求齋 >, 지락재< 至樂齋 >, 서고< 書庫 >, 문성공묘< 文成公廟 > 등이 있고 회헌영정< 晦軒影幀 >(국보< 國寶 > 제111호),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 大成至聖文宣王殿座圖 >(보물< 寶物 > 제485호) 등 중요유물< 重要遺物 >과 각종< 各種 > 전적< 典籍 >이 소장< 所藏 >되어 있다. 정문< 正門 > 밖으로는 이곳에 통일신라시대< 統一新羅時代 > 이래 사찰< 寺刹 >이 있었음을 알려 주는 숙수사지당간지주 < 宿水寺址幢竿支柱 >(보물 제59호) 등의 불적< 佛蹟 >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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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더보기○선비문화체험 - 하회마을과 영주
* 양경님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08-02 13: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