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원시의회 임시회에서는 오늘 (2008.4.21.오전10시) 총무위원회위원장(송우섭)을 비롯한 의원들과 집행부 그리고 시민 사회단체 기자들이 지켜본 가운데 남원춘향문화선양회에서 청원한 청원 내용을 가지고 오후3시까지 열띤 회의가 진행되었다.
청원소개는 조영연 의원 이었으며 청원을 통해 노일용 춘향문화선양회장은 춘향제의 부끄러운 과거 행태를 벗고 우리나라 최고 전통문화축제로 거듭나길 바라며 청원이 되기까지의 배경을 설명했다.
오늘 청원은 의원들의 질의에 관계공무원과 춘향문화선양회장이 답변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질문 답변내용을 보면
먼저 오정현의원은 질문을 통해 춘향문화 선양회의 내부적 갈등을 지적하고 춘향문화선양회는 대승적 차원에서 거듭나야하며 춘향제를 남원시에 위임하는 춘향문화선양회나 위임을 받아 운영하는 남원시나 모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 정관을 무시한 내용을 청원 한다는 것이 창피한 일이라며 남원시와 춘향문화선양회의 문제를 제3자인 의회가 해결 한다는 것은 영역침범이라며 강하게 질타했다.
이에 청원을 소개한 조영연의원은 31년 만에 의회가 부활되어 행정을 견제 감시하라는 시민의 준엄한 심판을 받고 시민의 대의기관으로서 청원이나 진정이라는 절차를 통해 시민들의 억울함이 해소되고 긍정적인 변화발전이 있다면 개인이든 단체든 변화 발전을 위하여 의원으로서의 역할과 기능을 다해야 한다고 피력하고 남원시는 제78회춘향제를 보이지 않는 행정의 힘으로 휘두르고 있음을 지적하고 ‘온정주의(눈치 보기) 사고에서 탈피해야 춘향제가 바로 설 수 있다며 왜 남원춘향제전위원장은 고관, 명예, 권력이 중심이 되어야하냐”며 모두가 환골탈퇴 하는 심정으로 춘향제를 지내야 하며 이중구조로 흐르고 있는 구조를 강하게 비판했다.
아울러 춘향문화선양회의 내부 투명성과 이권개입 정관개정,선거관리규칙수정,인적네트워크구축,등을 지적하며 축제 마인드의 폭을 넓혀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강성원의원은 지역축제의 문제점이 남원만의 문제는 아니라며 춘향문화선양회와 남원시사이에서 피해는 시민들만 보고 있다며 투쟁이나 반목보다는 화합하는 모습을 강조 했으며 박문화의원은 오늘 청원이 오기까지는 “춘향문화 선양회가 주장하는 4가지 항목 중 앞으로 춘향제를 남원시에서 항구적으로 주관하는 것이 아니고 노일용 회장의 임기인 78회만 남원시에 위임 한다는 내용을 정립하고 싶은 것이라며 집행부에 질의 했으나 집행부는 향후 서로 협의해 가며 풀어가겠다고 말했지만 문서화 시키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강하게 비판을 받았다.
춘향제는 1931년 일제강점기에 남원의 유지들이 주축이 되어 권번(券番)의 기생들과 힘을 합하여 기금을 모금하고 당시 개성 진주 평양 동래 한양권번들의 협조 속에서 민족의식 고취와 춘향의 절개를 이어 받고자 설립하고자 설립하고 제사를 지냈다.
이러한 배경 속에는 당시 이지역의 선비들의 남녀평등사상과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 마다 분연히 일어서는 충절의 정신이 원동력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일본 경찰의 갖은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며 광복을 기다렸던 끈기는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독립정신과 민족정신의 발로이며 제관(祭官)이 여자라는 사실은 시사 하는바가 큰데 당시 시대 상황을 극복하기위한 지혜의 소산이 아닐 수 없다.
시대적 배경은 무시한채 잿밥에만 마음이 있어 춘향제에 대한 정체성을 회복하고 있지 못하는 춘향문화선양회와 민간주도로 치러져야 할 행사를 관주도로 치루기 위해 법을 어겨가면서 까지 온갖 회유정책을 쓴 남원시도 강하게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청원을 지켜보며 춘향의 저항정신은 온데 간데 없는 (작성중)
<오늘의 춘향제가 있기까지>
춘향제는 1931년 춘향사당을 건립하여 제사를 지냄으로써 시작되었고 춘향사당은 남원시립국악원의 전신(前身)인 남원권번을 창설한 노계소(노계소) 이현순과 지역유지 강봉기 그리고 당시 권번의 선생이었던 이백삼과 권번의 수기였던 최봉선 그리고 권번의 기생들이 앞장서서 사당건립기금 모금운동을 전개하여 이루어 졌다.
이 모금운동은 진주의 진양권번을 비롯하여 부산의 동래권번 평양 개성권번 등 전국의 권번들이 참석했다.
1931년 3월1일 춘향사당을 완공하였는데 당시 진주사람 강주수가 춘향의 초상화(肖像畵)를 그려 사당에 봉안(奉安)하였다.
춘향제는 권번의 기생들이 주축이 되어 춘향과 이도령이 광한루에서 처음 만났다는 음력 5월5일 단오(端午)를 제일(祭日)로 정하여 1931년 음력 5월5일 제1회춘향제를 올렸는데 당시에는 일제 치하의 극심한 탄압을 피해 주로 야간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 후 1934년 제 4회 때부터는 단오 무렵이 농사철로 한창 바쁜 터라 전국에서 모여드는 관광객들에게 불편이 많은 것을 감안하여 음력 4월8일로 바꾸어 1998년제 68회까지 행사를 치르다 1999년 제 69회 부터는 다시 양력 5월5일로 바꾸었다.
춘향제사는 1949년 제19회 때까지 권번에서 주관하였는데 각 지방의 권번 기생들이 참여하여 제관이 되었다.
제주는 줄곧 남원권번의 수기 최봉선이 맡아 보았고 제사 비용은 초기에는 제사에 참여한 제관들의 헌금(獻金)으로 충당하였다.
1950년부터는 제주인 최봉선이 기증한 제수답(남원시 어현2동과줜면 배덕리 소재1000여평)의 소출로 충당하였고 이때부터 민간주도의 제례(祭禮)가 행정기관인 남원군에서 주관하게 되어 단순한 제례에서 향토문화제전의 성격인 춘향제전으로 성격이 바뀌었고 제관도 종래의 기생들에서 관내 여학생들로 바뀌었으며 명창대회와 춘향선발대회등의 행사를 곁들인 향토 문화제전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 후 6.25동란을 겪으면서 춘향의 영정(影幀)이 훼손되는 등 어려운 가운데서도 행사는 계속되었는데 1961년에는 5.16혁명으로 인하여 그 동안 실시했던 행사가 모두 생략되고 사당에서의 제례만 드리는 것으로 축소되었다.
그러나 그 이듬해인 1962년에는 주관처가 전라북도로 승격되어 도(道)에서 직접 춘향제전을 주관하여 남원지역만의 축제가 아니라 전라북도의 대표적인 축제로 마련했다.
이를 계기로 차후 행사 경비를 조성 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또 한 6.25동란 때 훼손된 춘향의 영정을 당시 내각 수반이었던 송요찬 총리가 이당(李堂)김은호 화백이 두 번째로 그린 영정을 기증하여 세 번째 영정을 훼손된 영정과 바꾸어 봉안하게 되었다.
1973년 제 43회 때에는 제1회 전국 명창대회를 개최하여 판소리의 고장으로써의 긍지를 갖게 되었으며 궁도 대회 등 민속행사가 부대 행사로 개최 되었고 1981년 남원읍이 시로 승격 되면서 남원군 주관의 행사가 1982년부터 남원시로 이관되었고 1983년 제53회 때 명창대회의 대상이 문공부 장관 상으로 1984년 54회 때에는 국무총리상, 1985년 제55회 때부터는 대통령상으로 격상시켜 명실 공히 판소리 동편제의 발상지로서 그 위상을 드높이고 명창의 등용문으로 격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