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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정을 찾아서....

글쓴이 : 양경님 날짜 : 2008-05-01 (목) 14:12 조회 : 2049


눈물의 오리정

남수련가수의 노래다.
춘향아 울지마라 춘향아 울지마라.
춘향아 가면은 아주가며 간다고 잊을소냐.

사창에 달 밝거든 나본듯이 보여다오.
옥가락지 둥근듯이 옥가락지 둥근듯이.
우리사랑 어이 잊으랴.

도련님 만나자 이별이 왠말이요.
꽃다운 이팔청춘 이별이 왠말이요.
독수공방 긴긴밤에 나 혼자 어이 새나.
짝을 잃은 외기러기 짝을 잃은 외기러기
우는 소리 어이 들리나.

제 78회 춘향제를 하루 앞 두고 오리정을 찾았다.오리정은 1984년 4월 1일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56호로 지정되었다.그러나 현재의 건물은 1953년 3월 건립된 것이다. 2층 규모의 목조 누각으로 춘향고개 아래쪽 전주-남원간 도로변 오른쪽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고대소설 《춘향전》에서 남원 기생의 딸 성춘향과 남원부사의 아들 이몽룡이 백년가약을 맺고 행복하게 지내다가 남원부사가 한양으로 돌아가게 되자 부친을 따라 남원을 떠나지 않을 수 없는 몽룡이 춘향과 애절하게 이별의 정을 나눈 곳으로 묘사되어 있다


필자는 오리정의 경관에 감탄도 했지만 五里亭의 문화적 의미와 용도를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적어본다.우리나라에 오리정이 남아 있는 곳은 전라도의 남원 한 곳 밖에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시대를 겪기 전까지는 전국에 있었던 우리나라 미풍양속을 잘 보여 주던 곳이 바로 오리정이었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오리정에 대해서 말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그 의미이고, 그 다음으로는 오리라는 말의 거리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오리정이 무슨 목적에서 생겼으며, 그것이 어찌하여 일제시대를 지나면서 모두 사라지게 되었는가 하는 점 등은 간과해서는 안될 문제이기에 꼭 어필하고 싶다.



오리정은 조선조 때 관아가 있던 곳에서 서울 쪽으로 오리 정도의 거리가 떨어진 곳에 세운 亭子를 가리킨다고 한다. 서울 쪽으로 오리 떨어진 곳에 세워진 정자란 의미에서 우리는 이미 이것이 양반 문화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울을 향해 있는 것은 모두 양반 문화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양반에게 있어서 서울은 자신들의 군주가 계신 곳으로 세상의 중심이 되는 곳이다. 그러므로 조선조 양반들의 생각과 생활 등 삶의 모든 부분은 서울을 중심으로 하여 만들어질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것을 잘 보여주는 현상 중에 양반은 어디에 가 있어도 북쪽을 향해 절을 하는 사실을 들 수 있는데, 북쪽은 임금이 계신 곳이고, 그곳은 바로 서울이 된다. 어디에 가 있더라도 북쪽을 향해 절을 하는 북향재배를 하면 그것은 임금을 향해 절을 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서울을 향해 있는 모든 것과 행동은 양반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리는 얼마 정도의 거리일까? 오리는 지금의 2킬로 정도의 거리가 아니라고 한다. 조선조 시대의 1리는 지금의 미터 거리로 계산하면 약 2킬로 정도의 길이를 가진 거리다. 그러므로 오리정은 관아로부터 약 10킬로 정도가 떨어진 곳에 지어진 정자를 말하는 것이 된다. 자동차가 없었던 시대에 10킬로씩이나 떨어진 거리에 정자를 짓고 이곳을 어떻게 왕래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하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선조들이 만들었던 미풍양속의 하나였다는 것을 이해하면 참으로 머리가 숙여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조선조 시대에는 왜 관아에서 서울 쪽으로 오리 떨어진 곳에 이런 정자를 세웠을까? 관아는 지방의 행정 중심지로서 지방을 통치하는 수령들이 거처하면서 백성들을 보살피고 정치를 거행하던 곳이다. 다시 말하면 관아는 지방의 수도인 셈이다. 지금의 군청이나 시청, 도청 등이 있는 곳을 생각하면 된다. 그런데, 이처럼 관아가 있는 곳에는 중앙에서 오는 손님들도 많고, 중앙으로 가는 사람들이 출발하는 곳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손님을 맞이하고 배웅하기 위한 일정한 시설과 예절이 필요하게 된다. 예절을 숭상했던 우리 선조들의 삶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오리정인 것이다. 이런 절차를 위한 것으로 관아에서 오리 떨어진 곳에 정자를 세웠는데, 손님을 맞이할 때나 배웅할 때는 관아에서 오리 떨어진 이 정자에 와서 환영과 이별의 정을 나누었던 것이다.


오는 손님이 반가운 존재란 사실을 드러내고, 가는 손님은 보내기가 싫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예절로 쓰인 것이 바로 오리정이 되는 것이다. 특히 오리정은 이별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인식되는데, 그것은 맞이할 때보다 이별할 때의 사연이 더 많기 때문이다.



조선조 때에는 손님을 보낼 때는 반드시 오리정까지 배웅을 하고, 그곳에서 주안상을 보아서 술을 한잔씩 나누어 마시면서 이별시를 지어서 서로 화답한 다음 떠날 사람을 떠나게 하였던 것이다. 이별의 아쉬움을 이렇게 표현하면서 서로의 정을 나누었던 것인데, 이런 이별의 장소로 사용하기 위하여 지어진 것이 바로 오리정인 것이다. 따라서 오리정은 이별의 장소로 더 알려져 있고, 이별의 사연들은 오리정을 중심으로 형성된 것이 상당히 많다.

지금도 우리는 손님을 보낼 때 최소한 문을 나서서 어느 정도 걸어가다가 인사하여 보내는 습관이 있는데, 바로 조선조의 손님배웅 예절의 흔적이라고 보아 틀림이 없다. 그러나 오리정은 이별의 장소로만 작용했던 것은 아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손님을 맞이하는 장소로도 쓰였고, 이정표의 구실도 했었다. 오리정이 나오면 관아가 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나그네는 그곳에서 잠시 쉬어가도 좋았던 것이다. 이별의 정을 나누는 곳으로 지어진 오리정이었지만 여러 용도로 쓰였던 셈이다. 그렇다면 이런 구실을 하던 오리정은 왜 현재는 어디에도 남아있는 곳이 없는가?

오리정이 우리 문화에서 흔적을 감춘 것은 일본제국주의 시대를 지나면서부터이다. 우리나라를 강제로 점거한 일본은 20세기 초반부터 36년간을 우리나라에 머물면서 온갖 악행을 자행하는데, 자신들의 나라에는 없는데, 좋은 것으로 생각되는 것들은 모두 없애버리는 정책을 썼다고 한다.



지금의 남산 안중근의사의 동상이 서 있는 자리에 있었던 조선조 국조신을 모시던 국사당을 내쫓고 그 자리에 신사를 세운다든지, 자기 나라의 길보다 넓었던 종로와 세종로 등을 좁혀서 지금의 모습으로 만든 것, 그리고 지방의 관아를 없애버리는 것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 중에서 우리 민족의 문화를 말살하기 위하여 없앤 것 중에 중요한 것 하나가 바로 오리정의 말살이다.

우리 문화에서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던 오리정은 일본 같은 나라에서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비슷한 것조차 찾을 수가 없어서인지 오리정은 일본인들에 의해서 순식간에 사라지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 때 오리정이 없어지지 않았다면 아마도 수백 개가 넘는 오리정이 전국 곳곳에 남아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제는 오리정 고개라는 지명 정도로만 남아있지만 우리의 미풍양속을 잘 보여줄 수 있는 오리정을 되살리는 일도 우리 문화를 보존하고 이어가려는 노력의 하나로 추진되어야할 것으로 사료된다.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남원의 오리정은 남원시내에서 전주 쪽으로 10킬로 정도 떨어진 곳에 세워진 오직 하나 뿐 이라고 한다. 이 오리정은 춘향전 덕분에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춘향전에 보면 춘향이 이몽룡과 이별하는 자리가 바로 오리정이라고 나오기 때문에 수십 년 전에야 겨우 오리정을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증을 거치지 않아서 그런지 亭의 개념과 거리가 있는 모습으로 되어 있다는 지적이다. 지금의 오리정 모습은 이층으로 되어있는데, 이것은 亭이라 할 수 없고 樓라고 보아 틀림이 없다고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다. 亭은 일층으로 지어진 육각 혹은 팔각의 모양으로 언덕 위에 지으며, 나무로 된 마루를 깔아서 쉬어갈 수 있도록 만든 간단한 모습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亭은 자연을 감상하는 곳이 아니라 이별의 정을 나누거나 여행으로 지친 다리를 쉬어 가는 곳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박색고개를 넘어간 곳에 서있는 현재의 오리정은 이층으로 되어 있고 사각으로 된 집의 형태를 가지고 있어서 이것은 영락없는 樓의 형태를 보여준다. 정확한 고증을 거쳐 다시 지어지는 것이 마땅하리라고 본다. 특히 남원의 오리정 부근은 춘향이 눈물방죽, 춘향이 버선 밭, 말달리기 언덕 등 춘향과 이몽룡의 이별로 인한 유적들이 산재해 있는 만큼 오리정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중요한 유적단지로 조성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고 보니 남원시에서는 관심을 가져야 할 사항이다.아울러 78회 춘향제를 앞두고 전국에서 하나밖에 없는 오리정이 오리정의 기능과 역할을 다함으로서 전국의 명소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현재의 오리정은 남원시 사매면 월평리에 소재하고 있으며,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56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층 목조건물로 축조된 오리정은 1953년이 지어진 것이다. 오리정 맞은편에는 오리정 휴게소가 있고, 오리정은 노송 한 그루를 품안에 안고 당당히 서 있다. 앞으로는 작은 연못이 있는데 아직은 철이 일러서인가 수련 두 송이가 수줍은 듯 피어있다. 정자는 이층으로 되어있으며, 이층으로 오를 수 있는 계단은 없어지고 출입을 할 수 있는 공간만 입을 벌리고 있다. 정자는 그저 바라다만 보아도 운치가 있는데, 이곳이 춘향이와 이몽룡이 이별을 나누며 통곡을 했던 곳이라고 생각을 하니 가슴 한편이 서늘해지는 듯하다. 춘향가 오리정 대목을 알게 되면 이 오리정의 이별이 얼마나 서러웠는지 실감이 난다.*

* 양경님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05-04 22:13)

양경님 2008-05-01 (목) 16:32
  오리정과 구렁이의 전설

지금부터 약 1백50년 전. 춘향이와 이도령 이야기로 유명한 전라도 남원 고을에 대복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힙이 세고 매우 용감하게 생긴 이 사람은 맹리 말을 타고 전주 관가에 공문서를 전달하는 일을 했다.
어느 날, 전주에 서류를 전하고 오는 길이었다. 하지 무렵이라 해가 한창 긴 때인데 그날따라 흐린 탓인지 여느 때보다 일찍 저물었다.
「주막에서 하룻밤 묵어갈까? 아냐, 부인이 기다를 텐데 어서 가야지.」대복은 사위가 어두워지자 말 위에서 잠시 망설였으나 집에서 기다릴 아내를 생각하고는 다시 갈 길을 재촉했다.
춘향과 이도령이 이별했다는 오리정 고개에 막 다다랐을 때였다. 주위는 조용하여 말발굽 소리만 요란할 뿐인데 어디선가 대복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대복은 말의 속도를 줄이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귀를 기울였다.
『대복아! 대복아!』
분명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틀림없었다. 발을 멈추고 소리 나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던 대복은 그만 『앗!』하고 질겁을 했다. 바로 어깨 너머에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칠 큰 구렁이가 두 눈에 시퍼런 불을 켜고 혀를 날름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처럼 담이 크고 용감한 대복이도 이번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힌 뒤 점잖게 말했다.『그래, 무슨 연유로 남의 바쁜 걸음을 지체케 했느냐?』
『나는 백년간이나 이 오리정 연못을 지켜온 「지킴」인데, 흉한 탈을 벗고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소원이다. 그래서 오늘밤 내 너를 잡아먹고 나는 사람으로 태어날 테니 너는 이 연못의 지킴이가 되어 줘야겠다.』순간 대복은 허리에 찬 칼을 뽑아들었다. 그때였다. 허공에서 한 줄기 빛이 일더니 관세음보살이 나타났다.
『오리정 연못의 지킴이는 듣거라. 대복이는 본인의 심성도 착하지만 그 부인 불심이 남편을 위해 부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지성껏 시주하니 그 정성과 공덕을 보아 해치지 않도록 해라.』

평소 아내가 절에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던 대복이었으나 그날은 자기도 모르게 합장배례하고는 관음보살님께 감사했다.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과음보살은 간 곳이 없었다.『그대는 부인의 공덕으로 오늘 목숨을 건지었소. 그러나 나는 구렁이 탈을 벗지 못해 한이 되니 집으로 돌아가거든 내가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도록 부처님께 기도해 주실 부탁하오.』구렁이는 이처럼 신신당부를 하고는 힘없이 연못으로 들어가 버렸다.대복은 「어휴, 이제 살았다.」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알았다. 내 집에 가거든 네 부탁을 잊지 않고 열심히 기도할 것을 약속하마.』대복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아내에게 물었다.『여보, 당신 혹시 절에다 많은 시주를 한 일이 있소?』『들어오시자 마자 웬 시주 이야기세요?』절에 가는 것을 마땅찮아 하던 남편이 시주 말을 꺼내자 부인은 내색을 꺼렸다.『부인, 그렇게 곤란해 하지 않아도 되오.』눈치를 챈 대복은 담뱃대에 불을 붙인 뒤 오리정에서 일어났던 아슬아슬한 사연을 아내에게 들려줬다.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내는 여러 차례 관세음보살을 뇌이면서 부처님께 감사했다.『실은 당신께 꾸중 들을까 염려해서 밝히지 않았으나 얼마 전 대복사에 쌀 30석을 시주하고 삼칠일 기도를 올렸습니다. 바로 어제 회향했어요.』

『당신의 그런 지극한 정성이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쯤 오리정 연못의 지킴이가 되었을 것이오. 여보, 정말 고맙소.』그날부터 대복은 착실한 불제자가 되었다.『부인, 부처님 가피가 아니었다면 내 어찌 당신 곁에 이렇게 살아 있을 수 있겠소. 내 그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서 불사를 하고 싶은데 당신 뜻은 어떻소?』『그야 물으시나마나지요. 적극 찬성이에요.』『그럼 우리 절 대곡사 법당이 굉장히 낡았던데, 우리집 재산을 다 바쳐서라도 법당을 중창하도록 합시다.』

대복이 내외는 그날로 대곡사 법당 중창불사를 시작, 법당을 새로 지었다.낙성식 날이었다. 대복이는 많은 신도들과 축하객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자신이 법당을 새로 짓게 된 사연을 이야기했다. 사람들은 부처님의 가피에 감탄을 연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맨 앞줄에 앉아 있던 남원부사가 말했다.『듣고 보니 부처님의 가피가 진실로 하해와 같이 놀라울 뿐이오. 더욱이 그대 부인의 정성은 더욱 감동스러우며, 부처님이 계신 훌륭한 법당을 새로 지은 그 불심 또한 가상타 아니할 수 없소. 이러한 대복의 불심과 사연을 후세까지 기리기 위해 이 절 이름을 대곡사에서 대복사로 바꿔 부르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주지 스님의 의향은 어떠하신지요?』

『소승도 부사님 생각과 꼭 같습니다. 대복이란 크게 복이 깃든다는 뜻이니 아주 훌륭한 이름입니다. 이왕이면 부사님께서 「대복사」현판을 오늘 써 주시지요.』부사는 쾌히 그 자리에서 대복사란 현판 글씨를 썼다.그 후 대복이는 오리정 지킴이가 사람으로 환생하길 기원하는 백일기도를 올렸다. 기도를 마치는 날 밤이었다.『고맙소. 그대 때문에 나는 남자로 태어났소. 당신이 더욱 선업을 쌓고 정진하여 꼭 극락왕생하길 나는 기원하겠소.』꿈에서 깬 대복은 부처님께 감사의 절을 거듭거듭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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