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진성여왕 7년(893)에 창건된 것이라
전하는 대복사는 철불좌상 도지정 유형 제23호,동종 도지정 유형 제24호(063 -631-1144 )로 교룡산의 강한 기를 누르기 위해
도선국사가 세운 진압사찰이라 한다. 본래 대곡암이라 불렀으며 정유재란 때 소실되어 그후 중건했다 .대복사로 개명하게 된데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온다. "철종 때 남원부사청에서 근무하던 강대복이라는 사람이 자기 부인의 대곡암 불사에 백미 30석을 시주한 공덕으로 뱀의 업보를 받아야 할
것을 면했다 해서 법당을 중수하고 남원부사의 명에 의해 대복사라 개칭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법당 앞에는 당초에 만들었다는 석불이 남아 있으며
사방 2m의 넓이를 가진 탑의 지대석이 남아 있고 뜰 아래에도 석탑 지대석이 남아 있어 그 규모가 매우 큰 사찰이었음을 짐 작케
한다.
여고시절 친구를 따라 갔었고 큰 아들 초등학교때 문화유적 답사 할려고 찾았던 천년사찰의 모습을 찾기란 여간 힘들었다.사찰
주위의 무성한 풀과 잡초는 내 마음 만큼이나 심란하게 생겼다. 이곳은 신도도 없는 절인가 할 정도로 ......
한참 지나자 비구니 스님의
대답이 가슴을 여미게 했다.
스님?"여기 문화유적 인 철불은 어디에 있어요"하고 여쭙자" 어디에서 왔느냐"며 안가르쳐 주고 싶다고 하신다. "도난 당할까 봐
가르쳐 주지 말라고 했다니 어처구니 없는 일.세상이 이렇게 변해 버렸다니 슬픈 일이다.비구니 스님께서 그래도 여성의 부탁이어서 인지 마음을
여시고 자세히 설명 해 주신것은 통일신라시대 때 만들어 졌다던 대웅전 앞 돌계단이다. 우리나라에서 불국사와 대복사두곳에 있는 아주 귀중한
유산이라고 하시며 내가 제일 궁금해 하는 철불여래좌상은 대웅전에 있다고 가르쳐 주셨다.특히 부처님께서 목욕하시는 지단을 설명해주시는데 난생처음
들은 이야기고 보면 아직도 난 배울것이 너무 많음을 또 느꼈다.
"선방 용왕단(수각)보시 동참하여 (봉)의
인연 이고지고"라고 쓰여 있는 구절은 찾는이의 가슴을 찡하게 멍들 인 듯하다.가을을 재촉한 듯 대복사의 풍경소리는 석양을 붙잡는다. 더 이상
머물고 싶지않아 서둘러서 내려 온 나는 창주서원을 찾아 갔다.서원 보수공사중 이어서인지 주위가 파헤쳐지고 어수선했다.그러나 서원 앞 탐스러운
대추가 나를 반기는 모습은 지워지지 않았으며 따서 맛좀보라는 주위의 인심은 곧 남원인심 임을 느꼈다.
창주서원은 옥계 노진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조선 명종 1년(1546)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충청도 관찰사, 전주부사 등 여러 자리를 거쳤다. 그는 기대승·노수신·김인후 등의 학자들과 교류도 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정려도 세웠다.

창주서원은 선조 12년에 남원시 금지면에
고룡서원으로 지었으나 선조 33년(1600) 나라에서 ‘창주’라는 현판을 내려 창주서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고종 때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으나, 1959년 지금 있는 자리에 복원하였다고 한다.현재 서원에는 사당인 명덕사와 내삼문, 강당, 고직사 등의 건물이 있다.
명덕사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과 비슷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안에는 노진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해마다 음력 4월 8일에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창주서원에서 바라 본 요천수와 덕음봉, 그리고,지리산의 경치가 대단했었을 과거가 그립다. 앞을 막아버린 시멘트
콘크리트 건물이 웬지 얄미워 졌다.또 남원인으로서 자존심이 상한것은 창주서원의 주위 모습이었다. 서원 내에 웬 고물들이 구석구석 쌓여 있는지 고물상같았다.
노씨종친들과 남원시의 행정은 .............
".남원여행"홍보자료에 선비문화와 민속문화로 제일 먼저 거창하게 설명 해 놓은
창주서원(문화재 자료51호,도통동86-1)은 외지에서 어느누가 찾아올까 싶을 정도로 어수선하고 지저분했다.

이어 찾아간 곳이
남원서당이다.깔끔하게 정돈 된 서당에서의 아이들 글 읽는 소리가 너무 반가웠다.
갱정유도는 1945년 강대성(姜大成)이 창교한
신종교다.정식 명칭은 시운기화유불선동서학합일대도대명다경대길유도갱정교화일심(時運氣和儒佛仙東西學合一大道大明多慶大吉儒道更定敎化一心)이며, 줄여서
'일심교'(一心敎)라고도 한다. 갱정유도의 교리는 유·불·선에 근거하고 동·서학을 합일하되 그를 다시 유도로 구세한다는 기본 골격을 갖고 있다.
경전으로 〈부응경 符應經〉이 있는데, 이는 강대성이 쓴 영서(靈書)와 토설(吐說)을 모은 것이다. 또 생사교역은 천지가 거꾸로 지천(地天)이
되었다가 다시 천지로 바뀌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선천세계가 운이 다하고 노쇠하여 혼돈의 세계로 화한 것을 본래의 세계로 돌려 놓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갱정유도에는 3대 기념일과 24절후 치성의 의식이 있다.
3대 기념일은 음력 4월 8일의 지제(地祭), 8월 6일의
영신당주임화생일(迎新堂主任化生日), 10월 8일의 천제(天祭)가 있는데, 천제와 지제를 합쳐 '천지대제'(天地大祭)라고 부른다. 또 신자들은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영선도인법(嬰仙導引法)을 행한 뒤 두발을 손질한다. 신앙대상으로는 선당궁(仙堂宮)이 있는데, 이는 만선(萬仙)이 강림한
곳으로 제성제불제선(諸聖諸佛諸仙)과 충효열(忠孝烈)의 일기(一氣)가 모인 상징적 공간이다. 신자들은 이 선당궁 앞에서 치성을 올리고
신인합일(神人合一)을 빌고, 지상천국의 도래를 염원한다. 또 신자들은 치성 드릴 때 한복에 푸른 조끼를 입으며, 성인은 갓과 망건을 쓰고
아이들은 머리를 기른다. 교세는 강대성이 중흥국 사건의 여파로 사망한 다음 많이 위축되었으며, 강대성이 법통을 전하지 않은 관계로 교단에 분열이
일어났다. 그결과 한때 남원본부파와 원평파(院坪派), 그리고 계룡산 신도안의 김옥기파(金玉基派) 등으로 분열되기도 했으나, 이중 남원본부파가
주류를 이루어 2대 교주로 김창석(金昌錫)이 선출되어 교단을 이끌었다고 한다.김창석씨가 남원 조산출신임을 오늘 알고보니 앞으로 우리들의
관심분야가 되었다. 특히 1965년에는 신도 200여 명이 서울로 올라와 통일과 외세경계를 내세운 시위를 벌이다 입건되는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1963년에 문화공보부에 공식 등록했으며, 현재는 포교보다 내수도(內修道)에 치중하고 있다고 하 신 한재우 훈장님께서는
갱정유도(更定儒道)가 한결같이 추구해 온 조국과 민족의 통일 그리고 세계와 인류의 평화를 향한 역사적 발자취를 한데 모은 "평화와 통일(平和)
統一)"이라는 책을 선물로 주셨다.
"칠흑(漆黑)같은 밤이 지나면 이내 새벽의 서광(曙光)이 광명천지(光明天地)를 예고 하고,혹한(酷寒)의
겨울이 지나면 얼음 밑의 개울물 소리가 푸르른 봄날을 기대하게 히듯,인류의 역사도 마찬가지인것" 같다.
극도의 혼란(混亂)과
좌절(挫折)의 끝에서 인류는 선각자(先覺者)들의가르침을 통해 새로운 희망(希望)을 보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수 있다는 것이 청사에 길이
빛날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칠흑의 어둠에서 새벽의 서광을 먼저 깨닫고 혹독한 추위에 몸을 움직일 때 새로운 봄날을 먼저 예지하시어 새
세상을 보여 준 성현들의 얼을 길이 간직하고 싶은 날이다.요즈음 무척 힘들었다.하지만 오늘같은 시간이 있기에 나는 힘이 솟는다. 사람은 누구나
편안 할려고 노력한다.그러나 편안함 뒤에는 수고로움이 있어야하고.그 수고로움으로 말미암아 편안 하다면 그것은 진실한 편안 함이요. 만일 수고하지
않고 편안함을 누린다면 그것은 결코 행복하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

"고생끝에 락이 오면 즐거움도 있겠지"라는 생각으로 훈장님을
통해서 무 투쟁,무 분규,속에 살려고 다짐해 보지만 인간이 가야할 길을 생각하다보면 ...........
춘향제 때 "무료 가훈 써주기"
를 많이 하셨던 훈장님께서는 '남원의 경쟁력은 남원에 맞는 한 부분의 서당문화도 경쟁력이라"고 강조 하시면서 영어도,수학도,중요하지만 외국문화에
흡수되어 버린 우리문화 되찾기에 관심을 써야하며 남원도 평생교육도시로서 '우리 문화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표본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다.
서당에
와서 청학동에 대하여 많은 의견을 나눈결과 선진국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선진국 일수록 전통문화예술을 소중히 간직하지 않는가?
한국의 얼을
찾기에 적합한 도시 남원을 다양한 문화의 도시로 만들어 볼 필요가 있다고 보며 의미있는 하루를 남원서당을 생각하며 마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