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광한루서 ‘기념사업 발표회’… 학술·홍보사업과 생가복원, 국악제 등 제안 “배설향·이화중선·박초월·안숙선 계보 확립”
작고한 김소희 명창은 “그가 30대 때 그 앞에서 다른 여류명창들은 입도 못 벌렸다”고 돌이켰다. “목소리고 뭐고 구름 위에 달 떠있듯 수월하게 소리했다”는 회고였다.
이화중선(李花中仙·1898~ 1943). 일제강점기 최고 여류명창인 그를 재조명, 기념사업으로 발전시키려는 움직임이 그를 배출한 전북 남원에서 시작됐다. 남원문화원과 남원여성발전연대, 지리산판소리연구소가 그의 탄생 108주년을 기념해 14일 광한루에서 ‘이화중선 명창 조명사업 발표회’를 갖는다.
남원시립국악단 축하공연에 이어 기념사업 취지가 설명된다. 김용근 지리산판소리문화연구소장이 ‘이화중선의 예술인생’을, 한국고음반협회 배연형 회장이 ‘이화중선 음악론’을 발표한다. 그와 가족들이 살던 남원시 송동·수지면과 임실군 오수면 일대도 답사한다. 저녁 식사는 이화중선의 소리를 당대의 유성기로 들으면서 이뤄진다. 사업 아이디어를 토론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기념사업은 배설향·이화중선·박초월·안숙선으로 이어지는 남원 여류명창의 맥을 정립하면서 판소리 동편제 본고장이자 ‘국악성지’로서의 입지를 확실히 다지자는 뜻에서 이뤄진다. 남원문화원 박찬용 사무국장은 “문화계가 시작했으나 국악계를 중심으로 지역 각계가 뜻을 모아 사업을 구체화한다”고 했다. 홍보·학술·장학사업과 생가복원, 여류명창대회 개최 등 아이디어가 난상토론을 시작한다. 이화중선은 목포 출생으로 아버지를 따라 부산에서 유아기를 보내고 세 살부터 스무 살까지 남원에서 산 것으로 조사됐다. 김용근 소장은 이를 뒷받침할 그의 호적을 확보했다. 17세 때 수지면으로 출가한 그는 2년 뒤 송만갑·유성준의 ‘협률사’ 공연을 보고 집을 뛰쳐나왔다. 명창 장득주 등에게 사사하고, 서울에 올라가 송만갑·이동백의 가르침을 받았다.
기록은 ‘그의 등장은 판소리사에서 혁명적 사건이었다’고 적는다. 그는 유성기 음반시장의 황금기를 불러왔다. 여성 특유의 매력적 질감을 지닌 맑은 목소리, 빼어난 서정성, 쉬운 창법이 추종을 불허했다. 그녀의 음반 160여장 가운데 춘향가 중 ‘이별가’, 심청가 중 ‘추월만정’과 ‘선인 따라’, 남도민요 ‘육자배기’ 등은 당대 최고 인기를 누렸다.
1940년 무렵 대동가극단을 만든 뒤 전국과 일본을 돌았고, 1943년 재일동포를 위한 공연에 나섰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김창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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