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7월 20일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50호로 지정되었다. 금관가야 제10대 왕 양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고 춘추향례와 삭막향화를 드리고 있다.
532년(신라 법흥왕 19) 양왕은 금관가야를 신라에 선양하고 이곳 왕산(王山) 수정궁(水晶宮)으로 옮겨와 5년 뒤 죽었다. 그후 향화를 계속하다가 임진왜란으로 중단되었는데 1798년 심릉후 능하에 능침을 짓고 다시 향례를 올렸다. 1898년 승선전(수로왕 능침)이 사액됨과 동시에 덕양전으로 개칭하였다.
1930년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였고 1991년 중건하였다
가야의 역사는 오리무중이라고 하는 학자도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 가야를 왜곡함으로서 일본은 가야 일대를 두고 일본의 역사라 주장하면서 가야의 수많은 고분이 파헤쳐 일본으로 유물이 흘러갔다. 지금 사적 제214호 전구형왕릉을 두고 가야의 마지막 임금 무덤으로 추정하면서 숱한 의문점을 던지게 되는 것이 어떤 이유로 가야의 역사 한 부분이라는 것인가 하는 근거가 필요하지만 사실상 근거보다 입에서 전해지는 구전이 전부란다.
전구형왕릉은 면적 45,000㎡의 삼국시대로 금관가야 마지막 임금 구형왕(구해 또는 양왕)의 돌무덤으로 532년 가야의 왕으로 등극 632년 신라 법흥왕에게 가야를 내주고 산청으로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게 되는데 바로 김유신의 할아버지란다.
동국여지승람 및 산음현 산천조에 의하면 현의 40리 산중에 돌로 쌓은 구릉이 있는데...왕릉이라 전한다는 근거를 통해 구형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무덤은 돌로 피라미드 형식으로 언덕 경사면을 활용하여 쌓은 형태로 일반 석탑 형식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며, 전면 7단의 층높이 7.15m의 기단식 석단을 이루고 제4단의 동쪽에 폭 40㎝, 높이 40㎝, 깊이 68㎝의 감실이 있고 무덤 주변에는 이끼나 풀이 자라지 않는가 하면 낙엽도 떨어지지 않는 이적현상을 보여준다.
전 구형왕릉을 찾기 전에 왕산사에서 전해지던 나무상자에서 구형왕과 왕비의 초상화를 비롯하여 옷, 활이 발견되어 조선 정조 17년(1793년) 덕양전을 짓고 해마다 춘추향례와 삭막향화를를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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