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동면을 찾아서
송동면을 가 보고 싶은 날이다.요천이 지나는 송동면의 면적은 33.20평방 키로미터이고 인구는 2,637명이다.주요 문화재는 세전리 석불입상, 가덕리 석조 여래입상,이용화백세영수첩, 어필각, 취락당과 다수의 효열시설이 있다.
지형의 특성상 북동부 중산간 지역은 한우를 비롯한 축산업이 발달되어 있고, 전국적으로 유명한 춘향골 복숭아가 100헥터아르 정도 재배되고 있다. 또한 서남부 평야지대는 섬진강과 요천강이 만나는 양질의 퇴적토에서 딸기, 토마토, 감자 등이 친환경 농법으로 재배되며 스테비아 허브를 이용한 쌀인 남원 '참米'가 송동의 자랑거리로 자리잡고 있다.

먼저 가덕사 석조여래입상을 찾아갔다.송동중학교를 지나 이정표를 보고 찾아간 가덕사는 생각보다 깊은곳에 자라잡고 있었다.황금 물결이 넘실거리는 들녘의 풍요로움을 어느해 보다 만끽할 수 있는 기회임에도 실질적으로 마음의 풍요는 더디 여물어 가고 있는것 같다 .사람들이 조언하는 말이 때론 듣기 싫을때도 많다.또 만남을 제의해도 만나고 싶지않는 사람들이 있다.생이 더 여물어져야 하는 징후 일 것이다.전북 남원시 송동면 가덕사(加德寺) 대웅전 안에 모셔져 있는 가덕사 석가여래입상(가덕사석가여래입상)은 높이 179㎝의 불상으로, 광배(光背)와 불상의 몸을 하나의 돌로 만들었다고 한다.

민머리 위에는 낮은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육계)이 있고, 얼굴은 훼손이 심해 잘 알아볼 수가 없지만 작고 풍만한 것으로 보인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입은 옷은 굴곡 없이 직사각형에 가까운 몸에 평면적으로 흐르고 있다. 양 손은 가슴 앞에 들어 엄지와 검지를 맞댄 모습이다. 불상이 서 있는 사각형의 대좌(臺座)에는 연꽃잎이 새겨져 있으며, 그 아래 바닥돌에는 모서리 기둥이 새겨져 있다. 광배와 얼굴은 훼손이 심해 알아보기가 힘들지만, 신체 비례가 안정적이고 체구도 당당하여 고려 전기 남원지역의 석불 가운데 대표작으로 손색이 없다고 한다.
특히 그곳에서 동행하신분께 지장보살에 대해 들은 말씀이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부처님과 보살들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는 지장보살의 위력을 무시할수는 없지 않겠는가? 나는 108배를 하기전 엔 절대 지장각을 들여다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가덕사에서 내려 오는 길목에서 토실토실한 알밤을 주웠다. 어렷을적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밤송이는 발로 다루면서 옛 추억을 체험하는 기회로 무척 즐거웠다.

이어 송내 고인돌을 찾아갔다.
논 한가운데 초라하게 우뚝 서 있는 고인돌의 모습이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질퍽거리는 논두렁을 어렵게 어렵게 달래면서 찾아가보니 밑에는 시멘트로 덧칠을 해 놓아 문화재로서 가치가 손상 되었을 것으로 보였다.
표지석 하나없는 고인돌의 신세!
"학자들이 다녀가고 문화인들이 찾아오면 무엇하냐"는 푸념을 늘어 놓은 듯 해 부끄러웠다.
이어 찾아간 곳은 전라북도 남원시 송동면 장포리 508에 있는 어필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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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자료 제127호 (86. 9. 8)로 이 건물은 조선 고종 22년(1885)에 하문팔(河文八)·하준호(河浚浩) 부자의 효성을 기리어 세운 것이다. 하문팔은 손가락을 잘라 수혈함으로써 위급하신 어머니를 소생키는 등 지극한 효행을 보여, 나라에서 그를 표창하였다.
그의 아들 준호 역시 효성과 학덕이 높아, 임금이 그의 별명을 <운초재(雲蕉齋)>라 짓고 친히 글씨를 써서 이를 목판에 조각하도록 하여 내려주었다. 이 목판을 건물에 걸었기에 <어필각>이라 불리우며, 건물 안에는 전병국(全炳國)과 신응조(申應朝)의 글이 함께 걸려 있었다.
오늘의 마지막 코스다.즐거움이 쌓이는 곳, 조선 중종 때 김익기가 세우고 그의 아들 유가 고친 최락당 (最樂堂)을 찾아갔다.오늘은 찾아가는 문화재 마다 지역민으로서 부끄러울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왜 이 소중한 문화재를 방치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인지.........
찾아가는 길부터 무성한 잡초와 손질되지 않고 방치되어 있는 주위의 환경이 문화재임을 무색하게 했다. 최락당의 원래 이름은 야은당(野隱堂), 쌍백당(雙栢堂)이었는데 익기의 증손 선이 벼슬에서 물러나 후진양성을 하면서 최락당이라 고쳤다고 한다. 천장의 최락당이라는 글씨도 선이 썼으며 은행나무도 선이 심었다고 한다.최락당의 은행나무는 보호수로 지정되어도 손색이 없을것 같은데.....
또 최락당은 지역 유림들의 문회계(文會契) 전통이 400년이나 지속되고 있고 최락당(崔樂堂) 은 문화재자료 149호로 영촌(잿말)467번지에 소재해 있다. 꼭 가 보고싶은 곳이 있다면" 이용화 백세영수첩"인데 다음에 시간을 내서 가보자.
* 양경님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10-12 22:16) * 양경님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03-16 2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