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월면(引月面)
인월면은 남원시에서 28km동북쪽에 있으며 동경 127도 36분 북위 35도 28분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은 산내면, 서쪽은 운봉읍 북쪽은 아영면 동쪽은 경남 함양읍이 각각 접하고 있고 인월을 중심으로 서쪽 방향에서 진주 남강의 상류인 람천이 북쪽 방향에서는 풍천이 흘러와 인월 앞에서 합류되어 흐르고 있다. 또한 영호남을 이어주는 국도24호선(광주~울산)과 함양 우회도로인 지방도 1084호선이 교차하고 있으며 88고속도로 인월IC에서 1km가량 떨어져 있고 지리산국립공원으로 들어가는 관문으로 일찍이 상가가 발달하였다.
연혁으로 동면(東面)은 삼한시대 진한(辰韓)에 속하였고 신라 경덕왕 15년(784) 까지는 모산현(母山縣)에 속했고 785년에 모산현이 운봉으로 바뀌면서 천령군(天嶺郡 : 지금의 함양군)의 관할이 되었다. 고려 태조 23년(940)에는 역원(驛院)이 설치되어 남원부(南原府) 운봉현(雲峰縣) 인월역(引月驛)이라 하였다. 1895년(高宗 32년) 제1차 행정구획 개편에 따라 운봉현이 운봉군으로 승격됨에 따라 운봉군 동면에 속하다가 1914년 제2차 행정구획 개편에 따른 운봉군 4개의 면(운봉면, 동면, 아영면, 산내면)으로 분리되어 남원군에 편입됨으로서 다시 남원군 동면이 되었으며, 1995년 1월 1일 남원시 군이 통합되어 남원시 동면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운봉읍 연혁 참조) 본래 운봉군(雲峰郡) 동면(東面) 지역으로 장재(長才), 수성(水聲), 석치(石峙), 중군(中軍), 구인월(舊引月), 신인월(新引月), 신우(新牛), 용계(龍溪), 서무(西茂), 계암(桂岩), 사창(社倉), 구평(九坪), 용암(龍岩), 자래(自來), 내건(內乾), 외건(外乾), 성내(城內), 도장(道庄), 유곡(酉谷), 상우(上牛), 중우(中牛), 하우(下牛), 성산(城山)의 23개 리(里)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때 지하면(地下面) 이동(梨洞) 일부를 병합하여 남원군에 편입되고 명칭은 그대로 동면(東面)이라 하여 중군, 인월, 서무, 취암, 건지, 유곡, 상우, 성산, 자래 등 9개 법정리, 22개 행정리, 56개 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지리적 위치
남원시에서 28km 동북쪽에 있으며 동경 127도 36분 북위 35도 28분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은 산내면(山內面), 서쪽은 운봉읍(雲峰邑), 북쪽은 아영면(阿英面), 동쪽은 경남 함양군 함양읍(咸陽邑)이 각각 접하고 있고, 인월(引月)을 중심으로 서쪽 방향에서 진주 남강의 상류인 남천(藍川)이 북쪽 방향에서는 풍천(楓川)이 흘러와 인월 앞에서 합류되어 흐른다.
또한 영호남을 이어주는 국도 24호선과 함양 우회도로인 지방도 1084호선이 교차하고 있으며 88고속도로 인월 IC에서 1km가량 떨어져 있고 지리산국립공원으로 들어가는 관문으로 일찌기 상권이 발달하였다.
2. 면세(면적)
총면적은 37.47㎢로 시전체 면적의 5%를 차지하는 비교적 작은 면적에 속하며 농경지가 26.7%를 차지하고 있으며 전답별 비율로 보면 밭이 324ha이고 논은 669ha이며 밭이 농경지의 32.6%를 차지하고 있고, 임야는 2,471ha로 총면적의 66.5%이며, 대지는 43.4ha로 1.2%, 기타가 207.6ha로 5.6%를 차지하고 있다. 가구수는 1,279가구로 시의 3.8%를 차지하고 있고 인구수는 4,142명으로 시전체의 3.8%를 차지하고 있으며 남자가 2,118명, 여자가 2,024명으로 남자가 51.1%를 차지하고 있다. 면사무소는 당초 인월에 있었으나 1990년 5월 현재의 위치인 동면 서무리 628-3번지 배암등 언덕으로 이전되었다.
3. 지형
○ 일반지세
해발 420 ∼ 520m의 산간고냉지 분지형의 지형은 남쪽으로 해발 1,149m의 덕두봉(德頭峯)이 위치하고 서쪽은 황산(荒山), 동쪽으로 삼봉산(三峯山)이 있으며 중앙으로 상산(霜山)과 연비봉이 있어 상산을 중심으로 양쪽 아래쪽에 대부분의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풍천(楓川)은 아영면과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풍천과 남천변을 따라 비교적 넓은 평지를 형성하고 있어 수도작을 경작하고 산 아래쪽은 경사가 완만하여 고냉지 채소재배가 많다.
○ 산림형태
산이 총면적의 67%를 차지하고 있고 해발 1,000m가 넘는 덕두봉과 삼봉산의 아래쪽은 소나무숲이 주종을 이루고 윗쪽은 활엽수 잡목이 숲을 이루고 있으며 곳곳에 잣나무 및 낙엽송 조림지가 많아 잣을 수확하여 농가소득에 큰 보탬이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덕두봉의 대부분은 지리산국립공원지역에 포함되어 있으나 자연휴양림, 스키장 등의 조성에 적합하여 개발의 요소가 많고, 상산, 황산은 소나무가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해마다 송이버섯이 많이 생산되고 있다.
○ 해발고도
해발 고도는 산내면과의 경계가 가장 낮아 410m 정도이고 인월은 430m이며 성산, 장평 등은 520m에 이르는 고지대로 여름이 서늘하여 고랭지채소의 재배에 적당하다.
3. 주요산업 및 토산물
동면 지역은 옛부터 상권이 발달하여 지리산 거점 소도시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소재지를 벗어난 외촌은 논에는 수도작을 밭에는 고랭지채소와 감자를 재배하고 있고 지리산의 풍부한 임산물을 이용하여 가내공업으로 시작된 목기, 상(床) 등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생산지이다. 또한 상우리에 위치한 농공단지에서는 냉동만두, 식혜, 배즙과 목공예품 등이 생산되고 있고 중군리의 도자기류, 호박꿀 등의 공산물이 생산되며 동면에서 생산되는 잣, 토종꿀, 고랭지 채소, 감자는 품질과 맛이 전국 최고이며 주산지이다. 과거에는 목기, 삼베, 질그릇, 송이버섯, 종이(한지), 잣, 자두, 곶감, 재목 등이 특산물로 생산되었다.
4. 교통 및 통신
도로의 총연장은 50.5km인데 국도 24호선이 6km, 지방도 1084호선이 5km, 군도 25호선인 유곡선 도로가 6km, 면도·리도·농로가 33.5km가 연결되어 있고, 특히 지리산국립공원과 영·호남을 이어주는 중간 기점인 인월 시외버스정류장이 있어 교통이 편리한 곳이다.
전화 보급율 또한 1,266가구 전체가 100% 설치되어 있다.
5. 관광·문화·체육
중군리의 장제동 계곡은 가족 휴양지로 최근 인기가 매우 높은 곳으로 사철 물이 많고 계곡이 깊어 옛부터 동면 주민들이 즐겨 찾던 곳이며, 흥부 출생지인 성산리에 조성될 흥부 소공원과 중군 민속관광마을, 황산 피바위를 연계한 관광코스는 가족 테마여행 코스로 적당하다. 또한 문화재로는 곽치영 효자비를 비롯한 8개소의 효부, 열녀비가 있고 삼국시대 백제와 가야시대 부족장 무덤인 유곡리 고분군과 삼국시대에 축조된 성산산성(城山山城) 등의 유적이 있으며 매년 8월 15일 개최되는 면민의 날 전야제로 이성계 장군의 승전과 인월(引月)이라는 지명 유래를 상징한 '인월제(引月祭)'가 열리고 각종 체육 행사와 면민 장기 자랑이 열린다.
6. 복지·공공기관(교육기관)·금융기관
○ 복지시설 : 동면 복지회관회관은 노인들의 휴식처가되고 있으며
○ 공공기관 : 동면사무소, 남원경찰서 동면파출소, 남원소방서 동면파출소, 산림청 서부 지방산림관리청 무주국유림관리사무소 인월경영1팀, 인월우체국
○ 교육기관 : 인월초등학교, 인월중고등학교
○ 금융기관 : 인월농업협동조합, 인월신용협동조합, 인월새마을금고
○ 기 타 : 지리산낙농축산업협동조합 유곡 육성우목장 등이 있다.
7. 종교시설
종교시설은 사찰이 영선사, 영월사, 장안사가 있고 원불교 인월교당, 천주교 인월교당, 천존의 집등이 있으며 기독교 시설은 동광교회, 벧엘교회, 순복음인월교회, 인월교회, 인월금식기도원, 만인교회, 인월화평교회등이 있다.
8. 주요 기업시설
냉동식품 공장인 영우냉동식품(주)와 식품공장으로 영우냉동, 흥부호박꿀식품, 지리산 잣가공공장등이 있고 도자기 공장인 인월요업이 있으며 목공예 공장으로는 대림공예, 아영목공예, 지리산공예사, 중군공예, 다물공예, 삼대목기, 서무목공예, 서림공예등이 있고 2개의 석가공 공장과 2개의 벽돌 공장이 있어 지역경제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9. 특기사항
○ 흥부소공원 조성
흥부의 고향인 동면 성산리 일대에 14,894㎡의 부지에 흥부 놀부집을 비롯한 초가, 정자, 연못, 주차장등 편익시설을 '98년까지 2,230백만원을 투자하여 흥부 소공원을 조성하고 흥부전이 갖고 있는 권선징악, 공존공영, 청념정신등 건전한 국민정신 함양과 흥부전의 발상지로서의 대외적 이미지 제고와 광한루, 지리산국립공원과 연계한 관광코스를 개발중이다.
○ 인월(引月) 지명유래
동면을 흔히 인월이라고 부른다. 이는 외지인들에게 동면보다 인월로 더 알려져 있어서인데 인월(引月)이라는 유래는 다음과 같다.
1380년(고려 우왕6년) 키가 7척(尺)이 넘는 왜장 아지발도(阿只拔都)가 영남을 거쳐 북진을 하는데 삼도 도원수(三道 都元帥) 이성계 장군이 황산(荒山)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지발도가 팔량재를 넘어와 대치중 신궁 소리를 들었던 활솜씨로 퇴치할 작전이었으나 날이 저물고 마침 그믐밤이라 적군과 아군의 분별이 어려워 싸움을 할 수가 없어서 하늘을 우러러 "이 나라 백성을 굽어 살피시어 달을 뜨게해 주소서"하고 간절히 기도를 드리자 잠시후 칠흑같은 그믐밤 하늘에 어디서 솟아 올랐는지 보름달이 떠 천지가 개미 기어가는 것 까지 분간할 수 있을 만큼 밝았다. 때를 놓치지 않은 이성계는 부원수 퉁두란으로 하여금 먼저 투구를 쏘게 해 화살이 투구를 맞추자 아지발도는 끈이 벗겨지려 하는지라 입을 벌려 벗겨지는 것을 막으려하는 찰라 이성계 장군의 화살이 목구멍을 꿰뚫어 죽었는데 그가 흘린 피자국이 지금도 황산 람천에 있는 피바위에 남아 있으며 이때 이성계 장군이 달을 끌어 올렸다하여 인월(引月)이라는 지명이 생겨났다.
○ 인월 5일장
인월은 옛날부터 교통의 중심지로 전국의 보부상이 다 모여들어 운봉, 아영, 산내뿐 아니라 경남 함양, 마천, 산청등 지리산에서 생산되는 각종 특산물을 가지고 나와 거래하는 산중 도방의 오랜역사와 전통을 갖춘 시장으로 지금도 3일 8일이면 5일장이 성대하게 서는 곳이다. 인월시장은 고려시대부터 삼신산으로 불리우는 지리산을 중심으로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특산물인 지리산 약재, 목기, 유기, 과수 특산물과 일상생활용품 등 물물교환 형태로 거래하다가 시대가 변함에 따라 전국 각지에서 보부상들이 모이게 되어 점차 현대적 시장으로 형태를 갖추게 되었으며 한때 번창기에는 경남 함양, 산청, 전남 구례, 남원, 순창, 장수 등 지리산 서북 주변 3도 7개군에서 이용하게 되었고 그 규모도 산간시장으로써는 전국적으로 이름있는 시장으로 상품도 다양하였고, 특히 우시장은 함양, 남원 중심시장으로 많은 가축이 거래되었으나 교통발달로 지금은 거래가 되지 않고 있다.
http://www.namwon.go.kr/dongpage/inwol/bottom.htm
무형문화재 제 11-1호 (93. 6. 10)
김광열(金光烈, 1936년 11월 13일 생)
전라북도 남원시 인월면 상우리 350-9
남원의 목기는 특유의 향기와 정교하고 아름다운 모양,
단단한 나무 재질, 벗겨지지 않는 옻칠로 일찍부터 유명한 지역특산품이 되었다. 남원 목기산업은 합성수지제품에 밀려 잠시 퇴조하였지만 천연제품의 우수성이 알려지면서 다시 활기를 찾았다. 목기는 제사용 그릇, 화병 등 목공예품, 스님의 밥그릇이 주를 이룬다. 김광렬씨 집안은 삼대째 목기제작을 가업으로 이어오고 있다. 그는 1980년 전북사업디자인전 특선을 비롯해 1981년 문화재전승공예대전 입선,1984년 전북공예품경진대회 최우상 등 다양한 수상경력을 갖고 있다.
인월요업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옹기는 순수한 황토와 천연유약을 사용함으로써 적당한 습도와 공기의 통풍으로 기물 자체가 숨을 쉬며 음식물을 자연 발효시키며 맛과 신선도를 장기간 유지시키는 역할을 하는 최상의 기물로써의 특징이 있습니다.
한국의 미를 상징하는 전통옹기는 현대의 플라스틱 제품과 인체에 해로운 납 성분으로 이루어진 광명단을 사용하여 만든 현대 도기에 밀려 거의 소멸위기에 있으나 선조의 순수한 전통기법을 재현하여 화공약품이 전혀 사용되지 않은 잿물유약과 불의 조화로 형성된 기물이기 때문에 화려하고 고른 색채가 아닌 투박하고 자연적인 서민의 옹기로써 또 하나의 특징이 있습니다.
자연적인 발효가 이루어져야 제맛을 내는 김치는 물론 고추장, 된장, 간장등은 우리의 옹기만이 그 맛과 신선도를 유지할 것입니다.
황토는 지표의 10%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다량의 탄산칼슘(CaCo3)을 함유한 무독성인 흙으로 약성이 제일 강한것으로 알려져있다. 황토 한 스푼에는 2억 마리 이상의 미생물이 살아있고 다양한 효소들이 순환작용을 일으켜 각종 질병에 탁월한 효능이 입증되어 있어 흙으로 살아있는 생명체에 비유된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을 비롯 ‘동의보감’, ‘본초강목’, ‘향약집성방’ 등 옛문헌에는 황토에 대한 요법과 주요 효능들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인월요업 역사관 황토방에는 이런한 황토의 효능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는 황토맛사지, 황토옹기 목욕탕, 황토한증탕 등이 있어 황토의 생약효험을 즐길 수 있다. 황토로 만든 전통옹기, 황토를 이용한 겅간유지 방법을 체험할 수 있는 인월요업 역사관은 장인정신이 빚어낸 흙 문화의 결정판으로 남원지역 관광문화 발전에도 큰 몫을 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중군리
서기 1385년(고려우왕 10년) 배씨 일가가 이주하면서 자손들이 터를 잡아 살아오다가 서기 1590년경 배씨들이 몰락되고 전주최씨, 김해김씨, 안동권씨, 남원양씨등 4개씨족이 이주 정착하여 현재 마을의 주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임진왜란시 군사 요새지로서 전투군단의 편성에 있어서 전군, 중군, 후군과 선봉부대가 있는데 이중 중군이 주둔한 연유로 인해 마을이름이 중군이라 한것이며 당시 군단의 규모와 전투규모가 상당이 컸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구인월리
고려말 1375년(우왕1년)김씨와 이씨가 정착하여 마을을 개척하였으나 조선중기 진주강씨가 이주해 살다가 후에 김씨와 이씨는 몰락하고 이후 여러 성씨가 이주해와 현재에 이르고 있다
1830년(고려 우왕6년) 삼도 도원수 이성계장군이 남부내륙 지방 일대에서 약탈과 폭행을 자행하는 왜구 아지발도를 토벌하기 위해 황산에 진을 치고 왜구 두목 아지발도와 접전중 밤이 되어 어두워지니 적의 행동을 탐지하기 어렵기에 하늘을 우러러 달 끄기를 기원하니 동쪽하늘에서 달이 떠올라 아지발도의 목을 쏘아 대승을 하였는데 달을 끌어왔다하는데서 마을 이름을 인월이라 칭하고 후에 마을을 분림함에 따라 구인월이라 하게 되었다
월평리
마을앞이 넓은 평지인 관당들이 있어 인월에서 제일 넓은 들이라하여 월평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던 이곳은 1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살던 작은 마을이었으나 1978년 농촌주택개량사업으로 새로 집을 지어 인근 마을에서 이주해와 현재와 같은 마을이 형성되어 행정리로 승격되었다.
인월리
삼국시대부터 지리산권 물물교환장소로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지리산에서 생산되는 약초, 목기, 상등과 남부 해안가에서 생산되는 소금, 어류와 남원, 함양, 장수등에서 생산되는 생활용품이 교환되었으며 본격적인 마을 형성은 고려초기 김해김씨가 경상도로부터 이주하여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영.호남을 이어주는 간선도로가 형성됨에 따라 일찍부터 역촌을 이루었으며 그후 3일날과 8일날에 5일장이 개설되고 면 소재지로서 크게 번영하였다. 고려 우왕6년 삼도 도원수 이성계장군이 남부내륙 지방 일대에서 약탈과 폭행을 자행하는 왜구 아지발도를 토벌하기 위해 황산에 진을 치고 왜구 두목 아지발도와 접전중 밤이 되어 어두워지니 적의 행동을 탐지하기 어렵기에 하늘을 우러러 달 끄기를 기원하니 동쪽하늘에서 달이 떠올라 아지발도의 목을 쏘아 대승을 하였는데 달을 끌어왔다하는데서 마을 이름을 인월이라 칭하게 되었다
신인월리
1830년(고려 우왕6년) 삼도 도원수 이성계장군이 남부내륙 지방 일대에서 약탈과 폭행을 자행하는 왜구 아지발도를 토벌하기 위해 황산에 진을 치고 왜구 두목 아지발도와 접전중 밤이 되어 어두워지니 적의 행동을 탐지하기 어렵기에 하늘을 우러러 달 끄기를 기원하니 동쪽하늘에서 달이 떠올라 아지발도의 목을 쏘아 대승을 하였는데 달을 끌어왔다하는데서 마을 이름을 인월이라 하게 되었다 . 그후 인월 마을이 발달하여 점차 커지게되자 분할하여 신인월로 되었다.
서무리
이 마을을 처음 개척한 해주 오씨 선조는 풍수지리를 잘 아는 사람이었으므로 이른바 우백호, 좌철룡의 좋은 길지를 터 잡아 남쪽과 북쪽이 알맞게 산줄기가 뻗어 있고 마을의 형성이 남뽁과 북쪽으로 구성되어 남과 북이 서로 바라보는 형세를 이루었다. 그리고 남쪽 마을은 음지뜸, 북쪽마을을 양지뜸이라 하며 상호 견제하는 길지라 한다.
고려말 극심해진 왜구가 인월에 본거지를 두고 약탈, 살인, 방화등 무도한 만행을 저지르니 조정에서 이성계 장군을 보내 황산에서 왜구 두목 아지발도를 쏘아 죽이고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 인월과 가장 가가운 곳에 약간의 군사를 매복하였다 하는데 인월의 서쪽에 있으므로 마을 이름을 서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 또 군량이 되는 곡식을 이곳에 비장하였으므로 곡식은 한섬 두섬 ?맘틉灌? 것을 무더기라 한다. 그래서 서쪽 무더기를 서무덤이라 하다보니 덤을 빼고 서무로 변하여 마을 이름이 된것이라고도 한다.
다른 일설에 의하면 고려 때 몽고의 침입으로 많은 사람이 몽고병에 학살되어 마을 뒤 20m 지점에 말무덤이라는 조그만 동산이 있어 이곳에 묻혔는데 동쪽 무덤을 동무덤이라 하였으며 서쪽 무덤은 서무덤이라 하고 서무덤의 덤을 빼서 서무가 되었다고 전해 온 것이다.
계암
넓은 들이 개척되어 농토가 넓어지니 서기 1869년(고종6년)에는 동래정씨와 동복 오씨가 이주해와 마을이 확대되었으며, 그후 양씨 , 임씨, 조씨, 한씨, 서씨등 5개성이 차례로 이주하였다
이 마을은 처음에 계암(鷄岩)이라 칭하였다. 그런데 보통은 30세만 넘어서면 장수를 한다지만 어찌 된 일인지 마을 사람들이 30세를 넘기 전에 요사하니 한동안 마을이 몰락위기에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날 지나가는 노인이 풍수설로 해석하기를 “ 뒷산이 『매』 혈이고 앞산이 수리이니 병아리는 이 마을에 살 수 없는데 마을 이름을 『닭바위』(鷄岩)라 하였으니 사람들이 살 수가 있나? 마을 앞 청룡날이 계수바위(桂水岩)이므로 닭계자를 빼고 계수나무 계(桂)자를 쓰면 무사하겠는 것” 하고 사라졌다 알고보니 그 노인은 시느이 화신인 듯 그후 종적을 알 수 없었는데 하여간에 노인의 말대로 계수나무 계자로 고쳤더니 과연 어린이와 젊은이들이 죽지 않고 장수하게 되었다고 한다.
사창
고려말 이성계 장군이 왜적 괴수 아지발도를 토벌할 때 이마을에 군량미 창고를 두었으므로 사창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창이란 엄연히 한 관청의 구실을 띤 것이며, 운봉현과 운봉군은 삼국시대 이래 독립된 행정단위로 운봉현의 영내에 속한 동면, 이곳에 사창을 설치한 것이다
사창에는 사창미를 관리하는 관원들이 배치되어 춘궁기에 양곡을 백성들에 대해 하였다가 추수때 이자를 가산하여 회수하고, 환.과.고.독의 의지할 속 없는 사람을 사창미로 부양하였다.
신촌
1961년 7월 장마철의 집중폭우(230mm)로 인하여 동면의 수해 이재민을 이곳에 이주 장착시켜 새로 생긴 마을인지라 신촌(新村)이라 칭하게 되었다
취암
중종 25년 양성지외 여러 학자들이 동국여지승람 신증판을 편찬하였는데 이때 양성지가 전국의 산세 지형을 살피고 다닐때 이 마을에 당도하여 보니 둘레의 산세가 새집처럼 생겼는데 그 중앙에 독수리 모양의 큰바위가 있으므로 독수리 취자를 넣어 취암(鷲岩은)이라 칭하게 되었다 그후 마을 건너편에 있는 계암마을에는 닭바위가 있는데 닭마을 사람들이 젊어서 요절아는 사람이 이따르자 독수리 취(鷲 )자를 따를 취(就)자로 고쳐 취암(就岩 )으로 하였다
외건
원래 이마을은 물이 귀하다하여 건지산이라 하였다 그러나 건지산의 건이 여기서는 하늘 건자의 뜻으로 풀이해야 한다. 그런데 주씨가 권세를 누리며 살 당시 중만 오면 태테(사람의 몸에다 넓은 띠를 대고 그 속에 마른 콩을 넣어 물을 부어 콩이 불어나게 하여 고통을 준것)를 매어 애를 먹이곤 하였다. 그러다가 어느 중에게도 태네를 매려하니 중이 말 하기를 태네만 매지 않으면 물을 해결해 준다고 하므로 그 중의 말대로 마을 중심에 큰 전나무가 있는데 그 나물를 배면 물이 있다고 해서 전나무를 베니 그 곳에서 물이 나와 물은 해결하였으나 배설인 이 마을에 전나무는 돛대였으니 돛대없는 배가 있을 수 없어 주씨는 쇠퇴하여 뿔뿔이 흩어지고 마을은 본래의 뜻대로 건지리라 하였다. 그후 행정개편에 따라 외건지로 불리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내건
이 마을의 형국이 배 형국이고 배가 짐을 실으면 내건이 흥하고 배가 지을 풀면 외건이 흥한다는 설이 전하여 내려오고 있다. 이마을은 지형적 조건으로 물이 풍부하지 못하여 주민들은 물을 갈망하는 심정에서 마을을 하늘이 보호해야 한다는 뜻으로 건자를 따서 건지라 이름 지었으며 그 후 주민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지하수를 개발하여 식수 걱정이 없게 되었다.
지산
1970년에 정부의 독립가옥 이주계획에 따라 남원 근방에 산재한 독립가구를 모두 이곳에 이주케 하고, 주택 30동을 신축하는 한편 1세대당 개간농지 3,000~4,000평씩을 균등 분배하여 정착시킴으로서 새로 탄생된 마을이다.
유곡
마을 뒷산 골짝에 사찰이 있었고 연비산이 있는데 연비는 소리개(독수리)가 날아가는 뜻인바, 독수리에게는 닭이 있어야 하는데 마을의 형태가 닭장형이고 마을앞 안산은 닭장 가리개 형상이라 닭유(酉)자를 넣어 『유곡리』라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마을앞에 대장군석이 세워져 있는 것은 옛날 사찰의 유물이라 추측하고 있다.
도장
서기 1852년 동복오씨 어느 선비가 이곳에 터잡아 살았더니 마음이 안정되고 가족들이 건강한지라 정신수양의 도장이란 뜻으로 도장이름이 생겼다 한다.
성내
이 마을은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대로 그중 신라의 영토에 속하였다 . 마을의 서북쪽3km지점 아영면 성리에 성리 산성이 있었고 동북쪽1km지점에 토성이 있어 그 안에 마을이 있으므로 성안이라 이름을 지었다 성안을 한문으로 성내라 쓰게 되었으나 지금도 마을에서는 성안이름을 더 많이 애용하고 있다.
상우
양 160년전 은암거사가 은거하였으므로 『은마을』라 칭하여 오다가 그후 풍수설에 따라 지형이 와우형이라하여와우리라 칭하였는데 행정구역 분리로 상우리와 하우리로 분리되었으나 조선시대 작은 군사가 머물렸다는 일설도 있어 속은리라 불리기도 하며 지금도 여전히 은마을이라는 이름이 애용되기도 한다
하우
상우리와 같이 약 160년전 은암거사가 은거하였으므로 『은마을』라 칭하여 오다가 마을의 지형이 누워있는 소 즉 와우형으로 생겼다 하여 이름을 와우리로 바꾸었다 , 후에 행정구역을 분리함에 따라 윗마을, 아랫마을로 나누어 지면서 아랫마을인 이곳은 하우리가 되었으나 지금도 여전히 속은리란 이름을 애용되기도 하는데 이는 조선시대 작은 군사가 머물던 지역이라는 설이 있다.
성산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방인 이곳에는 마을 동쪽에 합미성이 있어 마을이 성의 북쪽에 해당하므로 오랫동안 성북리라 칭하였는데 1940년경 성산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합미성은 일명 노고성이라고도 하며 노고성은 순수한 우리말로 할미성의 뜻인지라 속칭 할미성이라고도 일컫는다
이 마을에 접한 팔량재는 해발 513m의 준령으로서 영.호남의 관문인 국도가 통과하고 있는데 일찍이 1592년 임진왜란때 조경남등 8명의 장군이 이 고개에서 용전끝에 왜적을 섬멸한 공이 있다하여 팔량재라 이름지었다.
이곳 성산은 “전라 경상 두얼품에 팔량재가 있었는디”로 시작되는 흥부전의 발상지로 흥부의 모태가 되는 형재애가 돈돈한 박첨지 이약기가 현재에 까지 내려오고 있고 대가 근긴 박첨지묘에서 매년 음력 3월삼짓날 마을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오다 현재는 흥부제가 열리는 음력 9월 9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용주
서기 1883년경에는 서씨, 김씨, 심씨가 모두 이주하여 정착한 후 처음에는 속칭 『논거리』라 칭하였으나 서기 1950년 마을앞에 밀양박씨의 묘가 있는데 무덤의 형세가 갈룡음수격이라 그 중에서 『용』자를 따고 또 무덤앞에 구슬여의 산이 있어 구슬 주자를 따와 용주로 칭하였다.
장평
마을이 형성되기 전 산과 들이 평탄하고 길다하여 속칭『긴평전』이라 칭한 곳인데 1970년 독립가구 집단이주로 새마을이 되면서 장평이라 칭하게 되었다
자래
이 마을은 삼국시대 신라의 영역으로서 임진왜란 이전에는 자연동이라 칭하였으나 김 잠이라는 사람이 장수군 산서면 사상리로부터 왜란을 피해 스스로 찾아 들어 무사하였다하여 마을이름을 자래리라 칭하게 되었다
홈페이지 바로가기 :
http://www.inwol.com
http://www.namwon.go.kr/tour/sub/mhj/mhj_mu.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