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시 운봉면 장교리에 있는 장교리 산성은 장교마을에서 서북쪽에 있는 해발640m 내외 높이의 산에 위치하고 있다.일명 할미성,합민성,합미성이라고 부른다.또한 남원시 이백면 주민들은 방학산성이라고 부른다고 한다.<남원지>에 의하면 재장교리 후 나제시고루'라 하였고 '합민성은 주위 약200간 (약360m)이며 산정에 있다'고 하였다.
성내 최고봉은 645m다.성곽은 능선을 따라 서남 방향으로 누에고치 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성벽 주위는 319.6m이다.주민들에 의하면 백제때 축성된 것이라고 하기도 하고 성내에서 수습되는 표기편에 의하면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며 1894년 동학혁명때 남원동학군의 공격을 막는 박봉양의 민보군이 식량을 저장하고 주둔하였던 곳이었다고 한다. 당시 성의 북쪽 방아치와 관음치 전투에서 동학군은 패배한것으로 필자는 알고 있는데어느시대인가도 중요하겠지만 남원인으로서 초소한 소재지를 확인하고 역사 문화를 재인식 하고 싶어서 초겨울의 찬바람을 가르며 장교 산성을 찾아간 ㄴ마원투데이 답사팀은 어렵게 찾은 성을 확인한 후 극찬을 아낄수가 없었다.
성은 테뫼식으로 돌로 쌓았으며 붕괴가 심한데 현재 300여m가 남아 있다.
산의 북쪽으로는 경사가 심하고 남쪽은 비교적 완만한데 모로 눕혀 쌓은 성벽의 잔존 최고 높이는 350cm 내외이다.성에는 門址로 추정되는 곳과 우물자리가 남아 있다.테뫼식인 이석성은 평면형태가 각을 죽인 제형 형태로 북사면은 경사가 심하며 봉우리가 북쪽에 치우쳐 있다.급경사인 이북사면에는 석성의 잔존상태를 살펴볼수 없는 것으로 자연급경사면을 그대로 이용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주로 성의 축조된 부분은 동쪽과 서쪽에 돌출된 치성사이 약300m사이에 석성으로 둘러져 있다.
성벽의 남쪽을 중심으로 동북.서북으로 성벽이 꺾이어 이어지다가 치성까지 연결되며 동쪽 치성 북쪽으로는 자연 경사면이며 서쪽치성 북쪽으로는 다시 꺾이어 북쪽으로 약20m정도 이어지다가 자연 경사면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치성은 동쪽과 서쪽에 각각1개씩 배치하였는데 평면형태는 장방향이며 성 외벽에 붙혀 길이 약10~12m정도 돌출하고 있다.치성이 위치하고 있는 성벽은 호선을 그리며 북쪽으로 꺾어 공간을 성벽위에 마련하고 있다.동쪽의 치성은 거의 무너져 성 외벽쪽 일부만 잔존하고 있다.
특히 동쪽 치성 부분은 먼저 호선의 성벽을 축조한 다음 폭4~5m ,길이 약10m 정도로 치성을 돌출시키고 호선이 성 외벽 안쪽으로 이어지고 치성에서 약1.5m,남쪽으로 성 외벽이 연결되어 수구나 성문지 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서쪽의; 치성은 성 외벽이 호선을 그리며 북쪽으로 꺽이는데 이 호선의 볼록한 지점에 폭10여m,길이 12m 정도의 치성을 돌출시켜 쌓았다.현재 잔존하는 높이는2m 정도이다.
성벽의 축조 방식은 방형이나 장방형의 석재 한면을 약간씩 치구하여 석재 외면을 고루게 하여 세로 방향으로 쌓은 다음 그 뒷채움석은 주로 세로 방향으로 나란히 채웠다.또한 성의 내벽은 확인 되지않았지만 성 안쪽 지면과 거의 동일하거나약간 높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성의 취약지역인 성 남쪽 사면에는 토루로 여겨지는 외성을 쌓았다. 성 남벽에서 아래 쪽으로 20m 떨어진ㄴ 지점에 남쪽 성벽과 평행하게 이어 지는데 그 토루의 일부 를 절단하여 분묘한 지점에서층위 아래쪽에 흑색의 유기물층을 확인할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성 남벽에서 안쪽으로 10m 지점에는 남벽과 나란하게 내 성벽을 축조 하였다.성벽의 높이는 대략 4~5m로 성 남벽과 일정한 폭으로 이어진다. 내성벽의 축조 상태는 성벽의 축조 방식과는 다르게 판판하거나 두께가 얇은 판석으로 뉘여 쌓았으며 외면도 엉성해 보인다.
성의 부대시설로 우물이 있었음을 확인할수 있었고 정상에서 본 운봉고지와 남원의 저지일대를 관망할수 있었다.
즉 성벽의 축조 상태나 치성의 위치,그리고 성 남쪽 사면의 허술한 곳을 보완하기위해 시설한 토루의 외성이나 성 안쪽의 내성등은 장교리 산성이 지닌 성격을 가늠케 한다.다시 말하면 이산성은 북으로는 남원저지대를 관망할수 있고 남으로는 운봉고지가 한시야에 들어오며 남서쪽으로는 준향산성,노치산성, 정령치까지 산정이 연결되고 있다.
또 북동쪽으로는 고남산성,성리산성이 연결되어 있다. 주민들에 의하면 백제때 축성된 것이라고 하나 성내에서 수습되는 표기편에 의하면 삼국시대에 축성된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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