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멈출 줄 모르고 퍼 붓는다. 나는"아무리 길이 막히고 비가와도 날이 새지 않은 밤은 없으니 떠나자"고 제의했다. 무슨 일이든 만물속엔 신의 의지가 있으니 염려하지말고 ...............
전남 강진군 도암면에 있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유물관과 유배가셔서 18년을 살으셨던 흔적을 찾아가는 시간은 2007년 9월의 첫날 오후 1시30분이었다.머뭇거리지 않고 우중에도 과감하게 추진 해 떠나는 우리 답사객 각자 각자의 마음은 똑 같았다. 역시 마음이 통하고 뜻이 통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은 항상 즐겁다.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기 전에 나로 인해 남이 행복할 수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행동으로 옮기기 위한 사람들끼리의 답사다.세상에 돈이 많으면 무엇하냐?
쓰는 방법이 더러운 데,또 많이 배우면 무엇하냐? 개인의 영달을 위해 어두운 곳에 빌 붙어 기생하는 모습이 불쌍한데,차라리 그 시간 금보다도 더 귀한 선인과의 만남을 갖자.그 분들의 사상과 이념으로 무장되어 이 힘든 세상 곧고 강직하게 살자는 마음이 드니 발걸음이 한층 가벼웠다.
다산 선생의 유배생활을 일반인들은 심신으로 느끼기가 힘드리라고 본다.그러나 나는 몇 천 만분의 일일지언정 이해할수있다 .작년의 오늘을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기만하다.간단하게 아침 겸 점심을 먹고 감자 몇 개를 삶아 동행인들과 먹으면서 차안에서 또 많은 토론의 시간이 있었다.
특히 건강에 대한 토론은 서로의 건강을 채크 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이젠 함께 운동도 해야 할때가 온 것 같다는의견도 모아졌다. 경기도 남양주시가 고향인 다산 선생은 이곳 강진까지 유배오실때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지금도 물어물어 찾아오기 힘든 곳 인데.................. 황금 물결을 이룰 들녘이 조선시대에는 바다였으리라 짐작이 되는데 이곳을 오실때의 심정은 어느것,무엇으로도 표현되지 않았으리라고본다.
드디어 다산초당(茶山草堂)을 찾았다.이곳은 정약용 선생께서 유배생활중 10여년간의 안식처가 되었고 "목민심서"를 집필했던 곳이다.소나기 속에서 초당가는길의 92개 돌계단을 오르다 보니 적송(赤松)숲과 하늘을 찌를 듯한 대나무의 숲이 다산 선생과 우리들에게 세상을 거꾸로 보기를 가르쳐 주었던 민초들의 넋이 살아 있는 듯 제멋대로 뒤틀린 고목이며 거칠게 앙상한 뿌리를 드러내고있었다.
초당 뒷편에는 해배(解配)를 앞두고 발자취를 남기는 뜻으로 선생께서 직접"丁石"이란 글씨를 바위에 새기고 정석바위라고 했다고한다.
다산 정약용은 조선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로서 1801년 황사영백서사건으로 둘째형은 흑산도로 다산선생은 강진으로 유배되었으며 유배생활은 강진읍 동문안 주막에서 4년을 거주하고 고성사 보은산방에서 2년, 목리 이청이란 제자집에서 2년등 8년을 읍내에서 지내셨으며 1808년 봄에 도암면 귤동마을 외족인 윤단(1744ㅡ1821)등 해남 윤씨들의 배려로 500여권의 책을 저술하였다고한다. 1818년 당시 58세에 해배되어 귀향후 미완성되는 책을 마무리하면서 여생을 보내시다 1836년 당년 75세로 생을 마감하셨다고 한다.이곳은 아직도 허술하기만 했다 앞으로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길이 보존되어야 할것이며 학문적으로도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보며 시간을 내어 경기도 남양주군의 묘소에 한번 가보고싶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다산초당은 유적 보전회에서 허물어진 초가를 치우고 기와집을 만들었다는 데 좀 어색했다.특히 초당에는 "다산초당""보정산방"이라는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씨체가 걸려 있었고 초당에서 남동쪽으로 동암이 있고 제자들의 유숙처로 차와 벗하며 밤 늦도록 학문을 연구한 일명"다성각"이라는 서암이 있으며 나의 눈시울을 적시게 했던 곳은 천일각이다.바라 보이는 강진만의 풍경이 아름답기보다 쓸쓸해 보였다. 흑산도로 유배간 둘째형"약전"을 그리며 심회를 달래고 가족을 생각하며 쓸쓸함을 이겨낸 곳인데 날씨가 좋으면 멀리 완도다도해가 한눈에 들어 온다고한다.하지만 그시절 다도해가 보이면 보일수록 더 괴로움이 크셨으리라 ....... 두고 온 가족들과 형제들을 생각하면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을 느끼셨을 텐데 ....... 나는 답사를 가기전 특히 정약용 선생의 부부애에 대하여 궁금했는데 역시 내조의 힘이 지금의 정약용선생을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엄한 유학자였기에 그리움이나 아쉬움에 대한 진솔한 표현은 찾을 수 없었지만 부부 홍씨의 사랑의 표현이 나를 눈물짓게 하였다.귀양살이 10년 되던 해 홍씨가 그리운 정을 표시하기 위해 시집 올때 입고 왔던 다홍치마 다섯폭을 다산에게 보냈다고 한다..얼마나 은근하고 그윽한 표현인가? 다산은 그 치마를 재단하여 두 아들에게는 교훈의 글을 써주고 외동딸에게는 화조(花鳥)를 그리고 화제(畵題)를 적어 주면서 화목한 가정을 이루어 살라고 하셨다고한다.두 사람의 사랑의 결실로 태어난 자녀에게 부부의 사랑을 넘겨주는 다산의 사랑표현이 감동적이기만 했다. "여섯폭의 다홍치마". 사랑하는 지아비를 강진으로 유배보내고 자식들을 키우며 그리운 정을 삭이던 홍씨(1761ㅡ1838)는 누에 치기를 좋아하는 자신에게 시진사칠수중내(珍詞七首贈內)를 지어줄 정도로 다정하였던 남편에게 시집올때 입고 왔던 여섯폭 다홍치마를 보낸다.10여년의 유배생활에 몸과 마음이 지쳤을 지아버지가 장롱속 깊이 간직했던 빛 바랜 하지만 신혼시절의 추억이 스며 있는 다홍치마를 보고 조금이라도 위안을 얻었으면 하는 마음이었을까? "매조도(梅鳥圖) 산수도 ,담묵 산수도를 통하여 조선의 3재중 한사람인 윤두서의 외증손으로서 서화에도 뛰어난 자질이 있었던 다산선생의 부부애야 말로 현재를 사는 우리도 본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해 본다.
이어 유물전시관에 들렀다.남영 조식 선생의 사상은 경의(敬義)이고 다산 선생께서 남기신 보고들을 보면 다산 선생의 사상의 요체는"개혁(改革)"이다. 그가 살았던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전반은 조선 봉건사회의 해체기로서 봉건적인 병폐가 도처에 드러나는 시기다. 이러한 총체적 위기 상황에서 국가를 구제하고 바로 세우는 길은 오직 개혁밖에 없다는 사실을 다산은 깊이 통찰하였다고 한다.또한 주자학 성리학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던 그의 개혁사상은 토지제도와 조세제도의 변혁을 포함한 것이었으며 신분제도의 고민까지 나아갔다고한다. 다산의 개혁사상을 담은책이 "경세유포"와"목민심서"그리고 "흠흠신서"인데"경세유포"는당시의 법질서 안에서의 지방행정의 개혁안 "흠흠신서"는 한국법제 사상 최초의 법률학 연구서이며,동시에 살인사건 심리 실무지침서라 할 수 있다.
비오는 날 집에 있으면 낮잠의 유혹에 넘어 갔을 텐데 아주 보람되고 의미있는 구월의 첫날이었다. 몰아치는 비바람을 이겨내고 도착한 시간은 저녁9시, 늦은 시간이지만 저녁식사를 남원에서 하자는 일행들은 한푼이라도 지역을 위해쓰고 싶은 마음을 서로에게서 확인했다. 이런 마음이 우리 남원시민들에게 있다면 지역이 이렇게까지 힘들지 않으리라고 본다.요즈음 며칠 88도로 안전성확보화 정상화를 위한 국민연대 활동으로 짜증 날 일이많았다.그러나 "짜증낸다는것은 내 자신으로부터 패배라고 생각하며 오늘처럼 선인들의 얼을 통하여 삶의 인내심을 배양하는 구월이 되고 싶다. 다산초당에서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위해사신 정약용선생의 곧은 삶의 기운으로 이달을 장식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