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의당의 흔적을 따라서......
1769년 동월 동일에 태어나 같이 자란 선남선녀는 춘향과 이도령의 사랑이야기가 얽힌 남원땅 서봉방에서 아름다운 원앙이 되는 꿈을 꾸며 보금자리를 꾸미었으리라.....이 한몸 고운 꽃에 달빛마저 드리우니
달빛에 비친 꽃이 그 더욱 고웁고니
곱고도 또 고운 빛이 우리 집에 비치오.
밝은 달 고운 꽃이 서로 엉겨 가득한데
꽃 같고 달도 같은 님을 마주 대하노니
그 뉘 세간영욕이 이보다 더하리오.
윗글은 열여덟의 꽃다운 나이(1786년 정조 10)에 선남선녀가 만나 서로 꽃이며 달이며 주고받으며 한 생애를 약속했음이리라......
이렇게 시작한 하립과 김삼의당의 아름답고 규범적인 삶의 이야기를 시로 남기니 그 향기로움이 바람결에 실리어 오늘에 이르러 그 향기의 흔적을 더듬어 본다.
조선 후기의 여류시인으로 본관은 김해(金海). 당호는 삼의당(三宜堂)이다.
전라도(全羅道) 남원도호부(南原都護府) 서봉방(棲鳳坊)=향교동 유촌마을에서 태어나 같은 해 같은 날 출생이며 같은 마을에 살던 담락당(湛樂堂) 하립(河립)과 혼인하였다. 삼의당과 담락당은 당시 남녀차별의 사회모순을 과감히 딛고 일어나 스스로 문학을 자기실현의 길이라 생각한 서민 계층의 부부 시인이었다.
그의 문집에 기록된 것처럼 남편 하립이 그 부인이 거처하는 집의 벽에 글씨와 그림을 가득히 붙이고 뜰에는 꽃을 심어‘삼의당’이라 불렸다 한다. 그는 평생을 두고 남편에게 권학하는 글을 많이 썼으며, 가장 규범적이요 교훈이 되는 글을 많이 썼다.
“김삼의당은 조선 후기 남원과 진안 지방에서 농촌의 여성으로 태어나 어렵게 문자를 배우고 글을 썼다. 그러한 배움의 과정을 비롯한 삶의 한 편린들도 귀하게 여겨 거의 일상의 모든 것이 글로 전각되었다. 물론 삶의 후반부는 한 집안의 주부로서의 삶이고 그 삶도 모두 글이 되었다.
조선후기 문학사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업적을 남겼지만 지금까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시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남아 있다. 이는 물론 전반적으로 한국에서 여성들의 업적과 존재가치를 남성들의 그것에 비하여 평가 절하해 온 남성 중심적이고 여성차별적인 관습에 기인한다. 또, 같은 여성문학인 중에도 문학적 수준보다는 남성들의 입에 회자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은 명문귀족의 집안이거나 세인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소위 유명인들을 중심으로 평가해 온 한국 문학사의 오랜 병폐에서도 비롯된다. 기존의 문학 연구나 문학사 기술이 문학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예나 지금이나 영향력 있는 남성들이나 그 집안과의 관계로, 다시 말해 신사임당이나 허난설헌 같은 이는 작품으로서도 상당한 수준에 있었지만 율곡의 어머니라든가, 허균의 누이라든가 하는 위치 때문에 더욱 세인들의 관심과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그것이 곧 바로 문학 연구자들의 관심과도 일치하게 된 것이다. 황진이나 홍랑 같은 기녀들은 기생이란 신분 때문에 명사들과의 교분을 가질 수 있었고, 그 계기로 더욱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에 비해 김삼의당은 자신의 문학 이외에는 별다른 화제 거리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 학계에서는 조선시대의 여류문학가중 으뜸으로 평가하고 있으며, 290여편의 작품이 현재 남겨져 있다.
폐허가 된 김삼의당의 집을 허물 때 지붕과 천장사이에서 직접 제작한 서첩이 발견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