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여러분을 초대합니다.

항상 남원을 사랑하고, 남원의 문화를 사랑하고, 남원의 무궁한 번영을 염원하는 우리는 오늘 200여 년 전 이 땅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멋진 삶을 살다 간 우리 남원의 딸이요 아내요 어머니였던 한 시인의 업적을 기리고 조명하려고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여러분! 시인은 위대하다고 합니다. 권력이나 총칼을 휘둘러서가 아니라 그들이 구사하는 짧은 시어(詩語)가 때로는 백만대군의 총검보다 더한 위력을 지니기도 하고, 촌철살인(寸鐵殺人)의 짧은 한마디가 천만 마디 장광설(長廣舌)보다 더 진한 감동을 주기도 합니다. 시인은 또 순수한 마음과 깨끗한 지조를 지녀 동서고금을 통해 인류의 사표로 존경받아왔습니다.
일찍이 공자(孔子)는 시의 공효(功效)에 대해 “《시경(詩經)》의 300편 시를 한마디로 말하면 생각에 간사함이 없다[詩三百 一言以蔽之 曰思無邪]”라고 하여 시는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정화하고 심지를 바르게 하는 힘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조선시대 같은 전통사회에서 여성에게는 교육의 기회가 아주 제한적이었습니다. 여자가 많이 배워 알면 주제넘다고 하여 《소학(小學)》의 내칙(內則)편이나 《내훈(內訓)》 등 출가하여 시부모 봉양, 남편 보필, 육아 등에 필요한 책을 언해본(諺解本)으로 익히는 것이 고작이었을 뿐 이른바 진서(眞書)를 배우는 일은 금기(禁忌)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우리는 신사임당(申師任堂), 허란설헌(許蘭雪軒), 김삼의당(金三宜堂), 송덕봉(宋德峯) 같은 많은 여류시인, 특히 한시(漢詩)를 남긴 여류시인의 주옥같은 작품을 대할 수 있어 행복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알아보려는 분은 그중 우리 남원 출신 삼의당(三宜堂) 김씨(金氏)로, 그의 시 세계와 생애 등이 될 것입니다. 삼의당은 1786년 김해김씨(金海金氏)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의 후손 김인혁(金仁赫)의 딸로 남원부 서봉방(棲鳳坊)에서 출생하여 1786년(정조10) 18세 되던 해 같은 해 같은 날 같은 동네에서 출생한 담락당(湛樂堂) 하립(河립)과 혼인하였습니다. 하씨 가문은 시아버지를 비롯 오형제가 다 시문에 능하여 시작(詩作) 생활이 비교적 자유로웠을 것으로 상상되며, 특히 남편은 아내가 거처하는 방 벽에 그림과 글씨를 가득 붙이고 뜰에 꽃을 가득 심어주면서 ‘그림, 글씨, 꽃 세 가지가 잘 어울린다[三宜]’라는 뜻의 삼의당이란 호를 지어줄 정도로 아내를 이해하고 사랑하였습니다. 신혼 첫날밤 부부가 주고받은 화답시(和答詩)는 고금을 통해 그 유례(類例)를 찾아보기 어려운 압권(壓卷)이라 할 수 있으며 이후 부부 사이는 일상생활의 애환(哀歡)을 시로 승화시켜 수작(酬酌)한 시우(詩友)였습니다.
생활은 비록 남편의 낙방 소식을 인편에 전해 듣고 부친 편지 내용대로 “지난해에는 머리를 깎아 당신의 양식을 마련하고, 올봄에는 비녀를 팔아 여비를 마련하였습니다.”할 정도로 가난하였으나 그녀의 진정은 “대장부가 나 같은 아녀여자에게 연련(戀戀)해 하지 말고 큰 꿈을 펼쳐 임금을 요순(堯 舜)처럼 훌륭하게 만들라.”는 것이었습니다.
현재 전하는 문집에 수록된 그녀의 시는 모두 260여 수로, 위에 든 신사임당, 허난설헌, 송덕봉 등 제가의 작품 수를 단연 능가합니다. 그런데도 아직껏 크게 조명을 받지 못한 까닭은 남원이라는 벽지(僻地) 출생이라는 한계 말고도 사임당에 있어서 아들 율곡 이이(李珥), 난설헌에 있어서 오빠 교산(蛟山) 허균(許筠), 송덕봉에 있어 남편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 같은 배경이나 후광(後光)이 없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동안 남원문화대학 등 각 사회단체에서 기회 있을 때마다 주장해온 기념사업 및 학술포럼이 늦게나마 이루어진 점 다행으로 생각하며 오늘을 기점으로 장족의 발전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오늘 여러 가지 제약에도 불구하고 본 발표회를 주관하여 주신 한국한문학회(韓國漢文學會)와 주제 발표를 해주신 여러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